2011년 3*4월호 [기획 - 불안] 나, 우리의 불안을 함께 헤아리는
나, 우리의 불안을 함께 헤아리는
임보라 ●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 연대
우리 곁의 불안
지난 3월11일, 이웃 나라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 참사에 대한 보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개미나 거미를 비롯한 인간들에 비해 아주 작은 동물들은 자연재해를 미리 내다보고 대피할 줄 아는 지혜를 가졌다고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며 오만함을 과시해오던 인간들은 오히려 이 같은 엄청난 재난 앞에서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미사일과 같은 속도로 밀려왔다는 쓰나미, 지진으로 인한 방사능 유출 위협, 물을 비롯한 필수 식료품 부족 등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광경을 시시각각 확인하면서,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도무지 인간으로서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지구촌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스멀스멀 스며들고 있는 요즘이다.
어디 이 뿐만이랴. 2011년 대한민국에 발붙이고 사는 이들은 분단 상황으로 인한 전쟁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온 지 60년이 넘었고, 가면 갈수록 심화 되는 양극화 현상 속에서 하루하루 생계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이들 수 또한 눈덩이 불어나듯 늘어나고만 있다. 현재로서는 점점 줄어가고 있지만, 천만 기독교인을 내세워가며 마치 이 나라가 본래 기독교 국가인 것처럼 종교권력을 휘두르는 이들 또한 늘어만 가고 있는 지금, 불안감이 감소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욱 증가되고 있는 아이러니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불안에 이르는 병
몇 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중의 하나인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쓴 『불안(Status Anxiety)』이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이 책은 원제로 보면 ‘지위로 인한 불안’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는데 책 머리에 “지위로 인한 불안은 비통한 마음을 낳기 쉽고, 지위에 대한 갈망이 지나치면 사람을 잡는다.”(9-10쪽)라고 꼬집고 있다. 불안의 구체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그리고 불확실성을 들고 있는데 잠시 그 꼭지들과 오늘의 현실을 이어보았으면 싶다.
1)사랑결핍: 말 그대로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무시’라는 말을 사랑의 반대말로 쓰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무시의 결과, 즉 사랑이 결핍되면 사람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으며, 주눅이 들어버리게 되는지를 담고 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까지는 무수한 장벽이 존재한다. 장벽을 넘어 생존을 획득하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한 치열한 싸움을 벌이거나, 싸움을 피해 ‘살지 않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는 사지로 내몰리는 가운데 우리는 ‘불안’을 직면하고 있다.
2)속물근성: 여기서 말하는 속물은 “하나의 가치 척도를 지나치게 떠벌이는 모든 사람”(29쪽)이며, 이 근성은 편견을 기반으로 한 차별을 일삼고 있으며, 이 속물들의 외면과 무시로 인해 불안과 함께 분노와 좌절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가치 척도’는 불행히 ‘하나’가 아닌 ‘여럿’으로 점점 늘어나고 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세분되어 가는 ‘하나들’로 인해 배제되어 가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고 ‘하나들’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은 불안의 요소들이 하나둘 늘어가는 현실 탓에 절망의 늪으로 빠져만 가고 있다.
3)기대: 여기서 기대란 물질적 진보를 뜻하는데, 이 과정에서 기대는 기대를 낳고, 낳는 무한한 희망의 전주곡이 아닌, 평등이 깨어지므로 생겨나는 좌절의 연속을 의미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라는 말이 있지만, 대부분 현대인에게 있어서 작은 것, 적은 것은 하찮은 것을 의미한다. 물론 병든 잣대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더 많고, 더 큰 것, 더 높은 것으로 치닫고 있는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함으로 인해 낙오되고, 소외감을 느끼며 궁핍에 빠져가는 이들이 그 빠른 속도에 비례하여 많아지고 있다.
4)능력주의: 이러한 체제 안에서는 결국 가난이 고통을 넘어서 수치와 모욕을 안겨준다는 이야기이다. 이 시대는 정의를 기반으로 한 분배의 의미가 점점 더 퇴색해져 가면서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 얼마만큼 부자인지가 가치 척도의 중심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일등 국민이어야 하고, 중년쯤은 되어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고, 결혼은 물론이요 자녀도 당근 있는 ‘모범’ 가정 이어야 하며, 병을 앓은 경력이 없어야 하고, 남녀 간의 사랑을 기반으로 한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며, 스펙의 결정판인 대학원 졸업장까지는 있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그야말로 차별만능 시대에서, ‘그 밖’, 혹은 ‘등등’은 열외일 수밖에 없다.
5)불확실성: 말 그대로 예측 수 없는 상황을 일컫는다. 특히나 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 때문에 생존권을 비롯한 일할 권리, 성취감 등이 순식간에 박탈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가져가는 것은 평화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꿈을 파괴하는 암적인 현상이다.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20대,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있는 여성들, 이주 노동자들, 늘어만 가는 노숙인들은 물론이요, “나는 아니야.”를 외치며 착각 속에 빠진 이들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남 일로 여기며 연대하는 일을 귀찮게 여기다 뒤통수를 사정없이 맞는 순간이 되어서야 자신을 잠식해 가고 있던 불안의 실체를 깨달으며 통곡을 하는 이들. 이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불안을 파는 사람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과 그에 따라 파생되는 온갖 불안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알랭 드 보통이 제시한 해법 중에는 ‘기독교’라는 꼭지가 있다. 그는 우리가 ‘개’독교라고 부르곤 하는 ‘그’기독교가 아닌“ 존엄과 기본적 자원의 평등”(334쪽)을 이루는 ‘본래’의 기독교 공동체를 상기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여기에 기독교의 진리를 불안을 제거하는 알약쯤으로 소개할 생각은 없다. 단지, ‘종교는 아편’이라는 호된 비판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아편’의 역할에 충실해지려고만 하는 점점 퇴보해 가는 종교의 현실 속에서도 ‘종교인으로 살아가기’를 고집하고 있는 나이기에 “고통과 번민과 불안과 대혼란으로 뒤덮여”(에스더 11장, 공동번역)있는 이 시대를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지에 대한 팁을 짧게나마 마무리를 겸해 나누어 보았으면 한다.
“조마조마하고 뒤숭숭하고, 몸이 편치 않은” 상태를 일컫는 불안은 ‘내 탓’이라기보다는 그 원인이 나를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비롯된다. 불안을 느껴보지 않은 생명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이 불안을 미끼로 이익을 남기려는 집단 또한 계속 존재해 왔고, 그 집단 중에는 부끄럽게도 ‘종교’집단이 한몫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길이 없다. 불안을 ‘팔아온’ 종교집단은, 구조적인 모순으로 양산되는 불안을 변혁의 몸짓으로 넘어서도록 권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잠시 현실을 망각함으로 순간의 희열, 카타르시스를 맛본 후 다시 불안의 상태로, 그리고 또다시 망각, 불안, 망각, 불안의 상태를 반복 재생산해왔다. ‘벌이’를 위해서 말이다. 이 과정에서 본질과는 동떨어져 버린 영성운동이 활개를 쳐왔다. 하지만, 각 종파가 다양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본래 이 ‘영성’이란 입에만 단 사탕을 먹는 행위가 아니라, 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다. 온갖 외부 영향 탓에 왜곡되고, 틀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이라고 할까. 때문에 영성회복의 주요한 통로인 ‘기도’도 나의 간구와 함께 그에 대한 신의 음성을 기다리는 ‘소통’의 과정을 전제로 해야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박수치며 열광적으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나의 일방적인 외침을 신의 귀에 억지로 심으려고 내지르는 행위가 기도라고 여겨져 왔다.
연대(solidarity), 나·우리의 불안함을 헤아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빙빙 도는 일상 속에서도, 모순덩어리인 삶의 자리에서도, 정의와 평화의 뿌리를 심어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 나 자신을 ‘투신’하기로 한 수많은 생명 지킴이들이여! ‘불안’이 엄습해 오는 그 순간을 두려워하지 말지니, 그 순간이야말로 오히려 ‘희망의 빛’이 스며드는 기회라고 여기기를 바라본다. 고장 난 기계에서 불량품이 계속 만들어질 때 취해야 할 조치는 고장 난 기계를 일단 멈추고! 고장 난 부분을 제대로 고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생존권을 위협하는 무수히 많은 불안의 요소들의 원인을 ‘함께’ 알아가고, 이에 맞서 ‘함께’ 연대하며 과감하게 수리해 나갈 힘을 키우는 것이야 말로 불안을 이겨내는 길이다. “나·우리의 불안함을 헤아리는”(시편 56) 이를 기억할 때, “그 어느 것이라도 두렵지 않습니다.”(같은 곳)라는 고백이 우렁차게 울려 퍼질 때 “어둠은 그 빛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요한 1)
임보라 ●
서울 토박이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다가 1987년 5월과 6월, 눈에 덮인 비늘이 떨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길로 접어든 이래 쭉 한길을 가고 있다.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으나, 진보적인 교단으로 알려져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현재는 향린교회에서 부목사로 재직 중이며,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무지개의 색처럼 다양한 정체성이 서로 공존하고,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존중받는 세상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라는 믿음 하나로 그 실체를 구현해내기 위한 방법에 골몰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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