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der board list icon](/assets/common/header-board-list-icon-871ea5b4968af0aff7ac9000984dc947.png)
2011년 3*4월호 [생생한 시각] 여성의 편안하고(安) 온전할(全) 권리를 위하여
여성의 편안하고(安) 온전할(全) 권리를 위하여
최김하나(하나)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최근 언론을 통해 일본 대지진 참사를 목격하면서 재해가 한 사람의 인간관계와 삶의 터전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위력에 어찌할 바 모른 채 슬프고 또 두려웠다. 어린 시절, 과도한 명예욕에 불탔던 나는 철없는 마음에 “난세를 비켜 태어나는 바람에 영웅이 될 기회를 잃었다.”라는 사실을 꽤나 아쉬워했다.(-_-;) 그러나 생각해보면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이 자신의 삶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음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설령 모험과 긴장을 즐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위험 요소들을 자신이 조절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에나 그것들이 삶의 자극제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나 역시 안정된 일상의 반복이 가져다주는 편안함을 때때로 누리고 있으며, 그 누구도 궁극적으로는 위협과 위험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살길 원하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안정적인 조건에서 계획대로 삶을 영위하길 바라는 것은 인간 본연의 욕구이자 권리이다. 그런데 나는 이 시대에 이 사회에서 단지 ‘여자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원치 않는 ‘추가 위험’을 덤으로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한지! 그것은 바로 여성 인권을 침해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위험이다.
“뉴스를 보시며 저녁을 드시며 밥풀을 튀기며 흥분한 김 과장
나쁜 놈 천지인 무서운 세상에 겁나서 어떻게 딸자식 키우나♬”
- 자우림 ‘김가 만세’ 후렴 가사 중
요새 정부나 지자체 정책의 경향을 살펴보면 ‘아동과 여성이 안전한 사회·지역 만들기’가 유행처럼 언급된다. 얼핏 보면 여성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여성 단체야말로 두 손 들어 환영할 일 같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오히려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말려야 할 판국이다. 여성 인권 정책 수립에 가장 앞장서야 할 여성가족부만 하더라도 여성 폭력 근절과 관련한 실질적인 예산은 오히려 일부를 삭감하고 그나마 역점을 둔 것이 ‘아동․여성 보호 지역연대’ 사업이다. 지역 차원에서의 연대를 통한 노력은 마다할 이유가 없지만, 분기별 회의에 대한 규정은 실적 보고용으로 형식에 그칠 것이 우려되고 그나마도 아동안전지도나 CCTV 증설 같은 내용이 이미 추진해야 할 사항으로 하달되었으니 지역 특성에 맞는 내실 있는 성과를 기대하긴 어렵겠다. 게다가 여성 안전을 아동 안전 문제에 끼워 넣기 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정책을 추진하는 해당 부처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아동에 대한 폭력이 각각 발생하는 원인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배경 분석은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위 사업을 포함한 여성 안전에 관한 대다수 정책이 여성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에 대한 위험이 도처에 널렸으니 우리 사회와 정부가 나서서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 일견 타당할지는 모르겠으나 안타깝게도 여성의 안전을 100% 믿고 의탁할 수 있을 만큼 자격이 충족된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정폭력 가해자는 다름 아닌 피해 여성들의 ‘보호자’였으며, 성폭력 가해자의 80%가 피해자 지인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여전히 쉽지 않은 것일까. 일본군 ‘위안부’ 피해나 국회의원에 의한 잇따른 성희롱 사건, 검찰의 성 접대 파문, 성매매 포주와 경찰의 유착관계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공권력에 의한 여성 폭력 피해 역시 만연하다. 이런 현실에서 또 다른 누군가(남성 권력 혹은 그 대리)를 통해 여성을 보호하고 지켜주겠다는 발상은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따름이다.
“김복동 과장 어린 딸이 둘 결혼한 지 8년이 됐어 나나나~
과장 회사엔 여직원이 둘 슬금슬금 만지곤 하지 나나나~♬“
- 자우림 ‘김가 만세’ 도입 가사 중
여성에 대한 보호담론이 그 자체로 위험한 것은 여성을 인격적 주체로 상정하지 않고 수동적 존재로 바라봄으로써 여성에 대한 불평등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여성 안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다시 말해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폭력이 있음을 반증한다. 그리고 그 폭력의 밑바탕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광범위하게 자리하고 있다.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 순종해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 남성의 성적 쾌락을 위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 곧 여성에 대한 차별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발생한다. 또한,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적극적으로 예방하고 대처하는 여성, 자신의 안전을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힘을 키우는 여성, 자신에게 안전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여성들이 ‘드세고, 까다롭고, 피해의식에 빠진 소위 여자답지 못한 여자’라며 비난하는 사회야말로 여성에 대한 폭력의 강력한 뒷배가 되어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진심으로 여성이 안전할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여성에 대한 ‘차별-폭력-보호담론-(다시)차별’로 무한 반복되는 순환 고리부터 끊어야 한다. 여성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 채 주변 통제와 감시를 강화하는 방식은 일시적으로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 외에 다른 예방 효과가 검증된 바도 없으며 궁극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 없다.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불안한 세상’이란 말을 너나할 것 없이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사회 분위기인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상황이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도 아니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결국 우리에게 단기간 내의 획기적 효과를 가져다주는 묘책이란 없다는 뼈아픈 사실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보아야 한다. 일상에서의 성차별을 당연하다고 여기진 않았는지,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쉽게 눈감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우리 사회가 여성을 하나의 인격적 주체로서 존중할 때 여성에 대한 폭력의 위험이 사그라지고 안전이 확보될 수 있다. 내일의 안전한 일상을 위하여 평등을 향한 오늘의 한 걸음이 절실한 때이다.
하나 ●
허영을 경계하려는 노력.*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