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6월호 [기획] 외양간 짚더미와 라디오
[기획]
버지니아울프 70주기를 추모하며, 2011년 “자기만의 방”
[내 마음의 방]
외양간 짚더미와 라디오
임정우(고래씨) ●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1.
한 초등학교 3, 4학년 무렵이었을까? 심심하기 짝이 없는 어느 여름날 오후였던 것 같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렇다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동네 아이들이랑 어울려 놀 의욕도 나지 않았다. 사실 ‘심심하다’라고 말은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살짝 우울했던 것도 같다. 다만 그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것일 뿐.
집에는 외양간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늘 보통 한두 마리 소가 매여 있었다. 불을 켜도 어둑하고 공기는 서늘했으며 천장은 높고 당연히 소똥 냄새도 짙게 나는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외양간의 절반은 짚더미며 소여물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 작은 사다리가 눈에 들어왔고, 그것을 밟고 짚더미 위로 올라갔다. 난 왜 짚더미 위로 올라갈 생각을 했을까? 모를 일이다.
짚더미 위에 올라앉자 세상의 그 어떤 이불보다도 푹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짚이 주는 까슬하고 서늘한 느낌도 참 좋았다. 나중에 삼베라는 천을 알게 되었을 때, 어릴 적 그 짚의 느낌이 겹쳐지기도 했다. 짚더미 위에서 한잠을 잤던가. 엄마가 날 찾는 소리에 깼던가.
그 후 그곳은 유년의 마지막까지 내 마음의 비밀 참호가 되어 주었다. 읽을거리를 들고 올라가기도 했고, 낮잠 자고 싶을 때도 올라가기도 했고,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삐치거나 울적해지는 일이 있을 때도 올라갔고, 엄마의 잔소리를 피하고 싶을 때도 올라갔다. 내게는 그만한 둥지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최초의 나만의 방이었지 싶다. 그것도 꽤 근사하고 낭만적인 방. 그 방에는 아무도 초대한 적이 없다. 초대하지 말아야지 하고 따로 마음먹은 것은 아닌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아마도 무의식 중에 그곳만은 끝까지 비밀스럽고 신성한 나만의 지성소(?)로 엄호해야지 했는지도 모를 일. 그래도 그렇지, 자랑하기 좋아하는 내가 그 방에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는 점은 좀 의아하다.
2.
그 후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읍내에서 자취를 하기 시작했고, 비밀 참호도 자연스럽게 잊혀져 갔다. 집이 하루에 버스가 두 대밖에 다니지 않는 산골 마을에 있다 보니 중학교를 다니려면 읍내로 나와 자취를 해야만 했다. 이로써 지금까지 이어진 길고 긴 혼자살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허나 어느 방도 어릴 적 외양간 짚더미만한 곳은 없었던 것 같다. 특히나 학창 시절에 거쳐 갔던 방은 더욱 그랬다. 뭐랄까, 외롭고 적막하고 다소 궁기도 느껴지고 그랬다. 흔히 어린 나이에 혈육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과는 무관했던 것 같다. 어렸음에도 혈육과 떨어져 지내는 것을 그리 애석해하지 않았으니까. 몸집은 작아도 약간 조숙한 구석이 있었던 난 부모님이 내 정서적 보루가 되어 주지는 못한다는 점을 일찌감치 눈치챘더랬다. 부모님에 대한 기대를 너무 일찍 포기한 아이.
사춘기가 찾아오고 혼자 있는 시간이 절대적이 되면서 이따금 찾아오는 외로움을 어떻게 무찔러야 하는지가 어린 내게는 최대의 화두가 되었다. 텔레비전도, 전화도, 당시로서는 당연히 인터넷도 없는 적막한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다 보면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다 맞아 내야 하는 그런 기분이 들고는 했다. 피할 여지라고는 없이. 그에 비하면 물질적 궁색함은,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 또한 절실한 문제였음에도, 내게는 ‘화두’로까지 다가오지는 않았다. 얼마나 다행인가. 가난마저 불편해하고 미워했더라면 내면이 얼마나 황폐해졌을런가. 또 자신을 얼마나 볶았을런가. 이는 내가 도시 빈민이 아니라 시골 빈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나 싶다. 시골에서는 어느 집이나 대개 살림이 고만고만했고, 부자라고 해 봤자 도시 부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여지도 그만큼 적었고, 또한 산과 들로 쏘다니며 자연을 풍성하게 향유하며 자랐던 기억이 가난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했지 싶다.
당시 내 방에는 둘째 오빠한테서 물려받은 라디오가 하나 있었다. 빨간색에 납작하고 미니멀한 모양의 라디오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대체 어디서 구했나 싶을 만큼 참 유니크하게 이뻤다. 남루한 무채색의 자취 세간들 사이에서 그것은 제 홀로 튀었고, 당연히 내 방 제일의 간지 품목이었다. 외로움과 적나라하게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 그것은 라디오를 들을 때 약간은 누그러지는 듯도 했다. 그리하여 조석으로 늘 라디오를 켜 두기 시작했고, 심지어 잘 때도 볼륨을 아주 작게 해 놓고 잠들었다. 그러면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덜 들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들을 수 없는 노래들이 라디오에서는 많이 나왔다. 그때까지는 아직 토크가 라디오를 점령하기 한참 전인 데다가, 한쪽에서는 성시완, 전영혁 같은 난다 긴다 하는 무림 고수들이 건재하고 있을 시절이어서인지 숨은 좋은 노래들이 정말 많이 나왔고, 음악 프로라면 말 그대로 음악에 충실한 편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지금보다는 그때가 문화적으로는 훨씬 다양하고 양질이지 않았나 싶다.
라디오가 내 감수성에 끼친 영향은 꽤나 컸지 싶다. 다소 마이너한 취향을 갖게 된 것도, 몽상가적 기질이 있는 것도. 얼마 전 MBTI에 관한 책을 보다가 N형과 S형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해 놓은 것을 봤는데, 내가 N형인 데는 분명 라디오의 영향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S형이 눈에 보이는 구체적 사실, 정확한 것, 현세적인 것을 중시하고 경험적 사실에 의존한다면, N형은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는 그 이면에 대한 통찰을 중시하고, 현재보다는 미래에, 경험보다는 상상력에 가치를 둔다는 것이다. 시각적 매체가 상상력을 현재 보고 있는 것에 가두려는 경향이 있다면, 청각적 매체는 오히려 그것을 해방시켜 주는 맛이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청각적 매체인 라디오는 내게 몽상가적 숨결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얼마 전 텔레비전을 치우고 대신 옛날처럼 아침저녁으로 라디오를 듣고 있다. 여전히 외로움은 잊을 만하면 찾아오지만, 나이 들어감의 징표인지는 몰라도(아, 이런 표현 정말 쓰고 싶지 않은데) 약간은 관조할 수 있게 된 것도 같다. 그럼에도 그 옛날에 그랬듯이 종종 라디오 볼륨을 낮게 해 놓고 잠을 청하기도 한다. 그러면 마치 어릴 적 외양간 짚더미 위에 누워 있는 듯 어느새 스스로 잠이 든다.
3.
글을 쓰면서 문득 지금의 내 방을 둘러보았다. 서울에 올라와 가장 오래 살았던 방. 남루한 것도, 혼자 사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건만 어째 옛날보다는 덜 적막해 뵌다. 책, 기타, 소나무 좌탁, 라디오, 해금, 붓, 벼루, 하모니카, 단소, 자전거 등 구석구석 좋아하는 것들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동무들이 놀러 오면 방이 나와 닮았다고들 한다. 그 사람을 닮은 방. 그만큼 마음이 깃들었던가.
내 방은 특히 비오는 날이 좋다. 옆집 양철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을 만하다. 어떨 때는 그 소리 녹음해서 지인들에게 들려주고 싶기도 하다. 그럴 때면 벽에 붙여 놓은 탁본의 구절도 제법 풍치 있게 다가온다. 청나라 때의 문사인 판교(板橋) 정섭(鄭燮)이 썼다. “집의 아름다움이 어찌 모름지기 큰 데 있으며, 꽃의 향기는 많음에 있지 아니하다(室雅何須大 花香不在多).” 그때 한번 방문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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