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8월호 [생생한 시각] 내겐 너무 복잡한 "희망 버스"
▣ 생 생 한 시 각
"내겐 너무 복잡한“희망버스”
● 우현권
그들이 처음 왔을 때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노동조합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유태인들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 주1) 김진숙 저, 2007, 후마니타스
● 미안함
‘미친소’때문에 촛불이 광화문 광장을 뒤덮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불통정부의 행태에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냉소했다. 미친 등록금 때문에 청계천 광장에 촛불이 모였을 때도 나는 침묵했다. 대학을 졸업한지 두 해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 문제로 다가오지 않았다. 뉴스, 신문을 통해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소식을 접하면서도 ‘저런’ 하고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1차 희망버스 얘기를 들었을 때도 그런가 보다 했다. 주변에서 2차 희망버스에 참가하자고 권유를 할 때도‘응원은 하지만 직접 참여하는 건 내키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마음에 걸렸다. 찝찝한 마음에 스윽 훑어보고 넘겼던 관련 기사를 꼼꼼히 읽어보고<소금꽃나무>1)도 빌려읽었다.‘ 내가 큰빚을 지고있구나….’책을 읽고 미안했다. 정말 희망을 줄 수 있을지 의구심은 들었지만 신문, 뉴스가 아닌 내 눈으로 보고 느끼고 싶었다. 미안함, 그리고 185대의 버스가 한군데 모이는 ‘사건 아닌 사건’에 대한 조금의 설레임 같은 걸 안고 7월 9일 희망버스에 올랐다.
● 후회 또 후회
서울에서 부산은 멀었다. 감기에 걸린 터라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5~6시간을 버스에 앉아있자니 답답하고 몸이 여기 저기 쑤셨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밤을 샐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누가 시켜서 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겁도 났다. 지옥을 볼 수도 있다고 가지 마라고 말리던 주변 사람의 말도 떠올랐다. 문화제만 참가했다가 근처 숙소에서 잠을 잘까, 밤기차를 타고 올라올까 부산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자꾸만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었다. 누구보고 알아달라는 듯, ‘아픈 몸을 이끌고 오다니 참 대단하다’는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참으려면 참을 수 있었지만 아픈 티를 팍팍 내고 싶었다.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추위와 더위, 공포를 견디며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85호 크레인 노동자 분들의 외로움을 생각한다면 민망한 일이었지만‘내 몸이 당장 아픈데, 내가 우선이지’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고 자취방 침대와 토요일 예능프로그램을 떠올리며 후회를 거듭했다.
●호기심 그리고 관찰
나는 희망버스에 탄 참여자이기도 했지만 관찰자이기도 했다. 월요일부터 기다렸을 황금같은 주말. 비도 오고 집에서 뒹굴 거리면서 만화책을 보거나 부침개에 막걸리나 한잔 하면 딱 좋을 날씨였다. 그런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즐길 수 있는 주말에 1만여 명이 금쪽같은 시간과 돈을 들여 전국 각지에서 부산으로 모였다. 희망버스에 오르게 된 사연이 정말 궁금했다.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각자의 사연이 다양했다. 진보신당 버스를 탔던 터라 당원들이 많았지만 혼자 온 사람도 있었고 남자친구, 여자친구와 같이 온 사람. 남편, 아이들 먹을 밥 차려놓고 혼자 왔다는 주부. 왠지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비장한 표정에 나와는 다른 사람일 거 같다는 촌스러운 선입견은 단숨에 사라졌다.
서로 싸온 음식도 나눠먹고 무한도전 얘기에 깔깔거리는 나와 별다를 거 없는 사람들이었다.
●낯설음, 흥분
7시가 넘어서 도착한 부산역. 비가 오는 데도 역 앞 광장을 꽉 채운 사람들을 보니‘와’소리가 절로 났다. 부산역은 각양각색의 깃발이 나부꼈다. 강원도, 충청도, 멀리 제주도에서도 승합차, 자전거, 비행기를 타고, 쌍용차 노동자 분들은 평택에서 아흐레 동안 걸어서 그렇게 한 자리에 모였다. 빗속에서 진행된‘희망과 연대의 콘서트’는 축제 분위기였지만 클럽에 처음 가서 눈치 보는 사람처럼 어색한 기분도 들었다. 민중가요라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따라 부르는 노래를 나는 알지 못했고 춤을 추며 흥겨워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어정쩡하게 박수만 쳤을 뿐 쉽게 어우러지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콘서트는 끝나고 10시가 넘어서 시작된 행진. 도로 한가운데로 행진할 때는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짜릿함이 있었고‘비정규직 철폐하라’, ‘살인해고 중단하라’나도 모르게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를 따라하고 있었다. 몇 시간쯤 흘러 영도다리를 건너 도착했을 때 주민분들이 환영 펼침막을 들고 일행을 반겨줬다. 무언가 지금 중요한 흐름의 한 순간에 내가 있다는 생각에 묘하게 흥분됐다.
●공포
‘폴리스라인은 안전의 다른 이름입니다’
조선소를 700m정도 앞두고 시민들의 행진은 멈췄다. 말로만 듣던 차벽이 장관을 이루며 우리를 가로막았다.‘ 여러분은 불법행위’중이라는 경고방송이 친절하게 나오고 있었고 우회 할 수 있는 골목길도 전경들이 빠짐없이 가로막고 있었다. 만화‘드래곤볼’에 나오는 전투복 같은 무장을 한 전경들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위협적이었다. 1만여 명의 시민은 놀라웠지만 93개 중대 8천여 명의 경찰은 아찔했다. 그들은 무작위로 사진을 찍어댔고 색소 물대포와 최루액을 쏘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얼굴에 최루액을 맞아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여기저기 기침소리, 물을 찾는 외침이 들렸다. 가방에 생수가 있었지만 내 몸을 피하느라 다른 사람을 챙길 여유도 없었다. 서로 싸우고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 곳이 지옥이라면 그날 봉래동 로터리는 분명 지옥이었다.
●온기 36.5℃
경찰과 시위대의 대치상태는 새벽쯤 되자 소강상태로 접어 들었고 몸은 지쳐갔다. 도로에 철푸덕 앉아 꾸벅꾸벅 졸았고 누군가 깨워서 건네주는 주먹밥을 감사하다는 말도 잊은 채
정신없이 먹었다. 눈은 자꾸 감기고 최루액이 옷과 신발에 묻어 계속 화끈거리고 아팠다. 졸다가도 따가워서 깨고 부채질을 해도 영 가시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기가 안쓰러웠는지 같은 버스를 탔던 일행분이 옷을 갈아입는 게 나을 거라면서 자기옷을 건네주고 다른 분들에게 물을 얻어 최루액이 닿은 곳에 뿌렸다. 처음 보는 사람도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고 괜찮냐고 걱정해줬다. 멍하니 있다 보니 날은 밝았고 미안함을 남기고 나는 아침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몸은 지쳤고 도저히 낮까지 버틸 자신이 없었다. 당장 출근부터 걱정됐다. 집에 돌아와서 시민들은 결국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지 못하고 오후 3시 쯤 해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너는 나다
부산에 다녀 온 지 몇 주 지난 지금도 희망버스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새로운 경험이었다. 방관자의 입장에서 논평만 하던 우리 사회의 문제들이 내 이웃의 일이고 아주 가까이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눈과 귀를 조금만 닫으면 마음 불편할 일은 없다. 주위엔 온통 즐길 것 천지니까. 퇴근할 때 영등포역을 지나치는데 노숙인들에게서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패밀리 레스토랑에 백화점, 명품샵까지‘불편한 현실’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지난 주‘나는 가수다’는 누가 1등 했고 누가 별로였는지 웃고 떠들 수 있는 얘깃거리도 많다.
희망버스를 타고 나서 내 생활, 내 생각이 크게 변한 건 아니다. 하지만 누가 내 편인지, 내가 관심을 갖고 손을 잡아야 할 사람이 누군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 힘을 주고 싶고 나도 힘을 얻고 싶어서’희망버스에 타게 됐다는 조금은 의아했던 어느 참가자의 말도 이제는 뭔 뜻인지 알 거 같다. 지난 해 나온 <너는 나다>라는 책 제목처럼 우리는 서로에게서 멀지 않다.
우현권 ●
버스에서 얼핏들은‘젊어 어영부영이 늙어 보약이다’라는 말을 생활 신조로 삼고 있다. 미중년, 노신사를 목표로 마지막 이십대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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