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8월호 [생생한 시각] 교회, 침묵을 말하다
▣ 생 생 한 시 각
교회, 침묵을 말하다
나온(유신애) ●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어느 대형 교회 목사가 여신도를 성추행 및 성폭행했다’는 뉴스는 이제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도 않은 기사이다.
<기독교여성상담소>에 따르면 상담내용 중 목회자에 의한 성폭력이 가장 많으며 이외에도 성가대 지휘자, 장로, 혹은 어느 그룹이나 선교단체의 리더에 의한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신앙공동체인 ‘교회’라는 조직에서 리더로 일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신도들에게 절대적인 신뢰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 스스로도 마치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대변하는 특별한 신적 권위를 부여받은 자마냥 행세하며 자신의 말에 순종해야 하느님의 복을 받는다고 윽박지르는 지경에 이른다.
교회라는 곳이 이처럼 권력관계가 굳어진 조직이고, 사람들이라면 이처럼 권력을 행사하기 쉬운 공간이 또 있을까? 이러한 조직에서 권력을 가진 위치에 있는 자에 의한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한다는 것은 한 조직 내에서 일어난 성폭력 피해를 말했을 때 부딪히는 사회적 편견과의 싸움, 혹은 가해자와 친분관계에 있는 사람에 의한 2차 피해를 넘어서는 일이다.
그것은 신의 뜻을 따르는 자에 대한 도전이요, 피해자는 신성한 공동체를 음해하고 와해시키는 악한 영의 지배에 넘어간 죄인으로 치부된다. 설사 피해사실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신앙의 힘으로 잘 극복하도록 돕는 일 외에 공적인 해결 방법을 떠올릴 만한 경험적 판단이 머릿속에 존재하기 어렵고, 그러한 기구나 장치도 거의 존재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것이 바로 성폭력 피해자가 겪어야 하는 무서운 현실이며, 셀 수도 없이 많은 교회들이 이에 대해 자정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 피해는 침묵 속에 가라앉고 또 가라앉아 예수가 말한‘천하보다 귀하다는 한 사람’의 영혼을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무리인 교회가 오히려 잠식하고 파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가 이 침묵을 깨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그러기 위해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야 하는 과제가 얼마나 많은지 요즘 나는 피부로 느끼고 있는 중이다. 최근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교우 간 데이트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문제를 공동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의지를 지닌 이들과 애쓰고 있는 중이다.
현재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최근 3년 사이 교회 내에서 가정폭력 사건이 알려졌었고, 사진 및 영상 촬영과 관련 성희롱에 대한 문제제기로 한 교우가 문제 해결 과정에서 교회를 떠나버린 일이 있다.
물론 우리 교회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판단의 근거로 삼을 만한 합의된 내규 같은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해결을 위해 어떻게 판단하고 접근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 차이가 첨예하게 부딪히면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경험을 했다. 공동체적인 해결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밝히고 문제제기를 했을 때 침묵으로 일관하지 않는 무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교회 공동체 일원들이 이런 사건을 대할 때 지녀야 하는 최소한의 합의된 인식조차 존재하고 있지 않음을 발견하고 실망감과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감수성을 지닌 그룹에서 성폭력 감수성을 높이기 위한 강의를 여는 등 우리 스스로 성찰해 나가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결을 위한 내적 자생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라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던 즈음, 최근 교우 간 데이트 성폭력 사건을 접하게 되면서 교회 내 반성폭력 내규를 만드는 일이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우울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이런 과정은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어느 조직에서나 경험하는 일들일 것이다. 다 원인 제공이 있었으니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피해자에 대한 편견, 이 문제를 공적영역의 문제로 끌어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인식, 가해자를 오랜 시간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무너지는 자신을 보기 싫어서 보이는 반응들, 상황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중립을 외치며 난 어떠한 판단도 개입도 하지 않겠다고 뒤로 빠지는 이들까지….
더구나 뉴스를 통해 접하는 낯선 사람에 의한 끔찍한 강간만이 성폭력이라고 인식하는 이들에게 데이트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설명해 가는 과정, 이것이 성폭력임을 이해시켜야 하는 과제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다.
내규의 내용물이야 이미 다양한 조직들이 합의하여 채택한 것들을 참고하고 교회 조직의 실정에 맞게 잘 수정․보완하는 과정을 거쳐 만들면 될 것이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일 것이다. 깊이 뿌리 박힌 남성중심의 왜곡된 성문화적 인식을 성찰할 기회를 만들고,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의미를 이해시키고 자신의 욕구와 상대의 욕구가 부딪혔을 때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조율하는 과정이 무엇인지를 같이 이야기 나누어 보는 과정들 말이다. 감추어져 있어 더욱 왜곡된 성에 대한 이야기는 일상에 널린 보통의 영역이고 교회 역시 그 영역의 이야기를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이번 교우 간 데이트 성폭력 사건을 해결해 나가며 개인적으로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피해자가 침묵을 깨고 나서서 적극적으로 말하는 용기가 사건 해결에 있어서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을 받아 안은 공동체가 상황을 판단하고 인식하는 과정에서 자칫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진실공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시점에서 어떤 지점을 명확하게 놓치지 말아야 하는지를 말이다.
혼란을 일으키는 요소들 사이에서 명확하게 걸러낼 지점들을 판단하기 위해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사건에 개입한 이들 사이에 소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야 하는지, 피해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못지않게 인정하지 못하는 가해자가 스스로 성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해결 지점을 모색하기 위해 얼마나 끈질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를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교회의 상담자로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목회자의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새삼 또 깨닫고 있다.
피해자를 대변하는 위치에 서게 되면서 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질문들을 만나게 된다. 다른 이의 삶에, 아픔에 공감하며 함께하기 위해 애 쓰는 자신을 보면서 나의 감정에 귀를 기울이고 나를 돌보는 훈련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 사람일까? 그것에 대해 의문이 들자 피해자에게 과연 내가 지금 필요한 적절한 역할을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감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피해자와의 관계 설정을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여기는 부담을 버려야 함을 깨달았다. 피해자가 나의 부담감을 걱정해 주고, 이렇게 같이 해결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엄청난 기적을 이루는 것이라는 확신을 나에게 심어주었고, 언젠가 우리가 웃으면서 말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렇다.
관계는 일방적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서로가 가진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비어 있던 틈을 채우며 그 과정에서 신뢰를 쌓아가고 같이 성장해 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이 일을 마주하며 배우고 있다.
마주하고 직면해야 할 것들, 그것을 피하지 않고 아프더라도, 실수하더라도 끙끙 거리며 그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 그렇게 배워가는 여정을 통해 교회의 일원들이 모두 같이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 우리 교회가 겪고 있는 이 성장통이 또 다른 누군가, 어느 교회의 성장에 맞닿을 수 있도록 남겨진 과제들을 힘 모아 잘 풀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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