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10월호 [생생한 시각] 아직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 생 생 한 시 각
아직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랑 ●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석순」편집위원
최근에 있었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들의 성폭력 사건(이하사건)은 학내,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전반의 성폭력 인식 수준 및 반(反)성폭력운동 전반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등에 관하여 되짚어 보게 만들어 준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이 반성폭력 운동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앞으로 해당 운동의 주체들이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여러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에 기초하여 어떠한 방향으로 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인가에 달려 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사건의 표면만을 건드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성폭력을 향한 사회의 시선이 과연 바람직했는지를 보다 심도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동체 문제가 아닌, 성폭력의 문제다
지난 6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남학생들이 같이 여행을 간 동기 여학생을 숙소에서 성추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피해 학생은 학내 양성평등센터에 사건 처리를 요구하는 한편 이와 동시에 가해학생들에 대한 사법적 조치도 취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건은 사회 전반적으로 공론화되었고, 특히 가해 학생들이 강하게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여론의 관심은 더욱더 증폭되었다. 하지만 사건에 대하여 학내 및 학교 외부에서 보인 반응의 양상들은 실제로 바람직하지 않았다.
우선 학내 구성원들 중 대다수는 성추행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성추행 사건이 소속 학교에서 발생했다는 점에 더욱 주목하였다. 다시 말해, 가해 학생들이 학교의 명예를 실추했다며 하루 빨리 학교에서 퇴출시키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성폭력, 그리고 더 나아가 성폭력 기저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구조적 권력관계를 뒤집기 위해서는 구성원들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다수는 성폭력에 관한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었다.
다만, 성폭력 가해자들을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서 쫓아냄으로써 하루 빨리 사건 처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듯 하였다. 사건에 대한 학교 측의 미온적인 대응 또한 매우 실망스러웠다. 처음에 나는 사건을 향한 섣부른 처리가 자칫 피해 학생에게 2차 피해로 다가갈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학교 측에서 신중하게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건 발생 후 몇 달이 지나도 학교측에서 가해 학생에 대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보고 사건 자체보다는 향후에 학교에 미칠 영향만을 신경 쓰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반성폭력 운동이 필요하다!
사건을 바라보는 사회 전반의 여론 역시 성폭력 사건 자체가 아닌, 성폭력 사건의 주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서(의대생이란 사실) 기인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었다. 성폭력은 누구에 의하여 발생하든 간에 어떠한 경우에도 합리화 될 수 없는 중범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 매체들은 장차 사회 지도층이 될 명문대 학생들이 이러한‘부도덕’한 사건을 일으켰다는 점을 자극적으로 상기시키는 데 급급할 뿐이었다. 성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환기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듯 하였다.
이에「석순」을 비롯한 몇몇 학내 단위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반성폭력 운동이 필요함을 절감하고‘고려대학교 반성폭력 연대회의’(이하 고반연)를 구성하였다. 고반연의 구성원들은
사건을 향한 사회의 시선들이 자칫 사건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데에 공통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학내 전반의 성폭력인식 및 실태에 관한 설문조사를 시작하였다. 지속적이고 다
각적으로 학내 분위기를 환기하고, 반성폭력 교육을 하여 궁극적으로 성폭력 자체를 근절하는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대조적으로, 학내 다른 단위에서는 적극적으로 문제의식을 드러내지 않는 듯하여 아쉬웠다. 사건 발생 및 공론화 당시가 여름방학 중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문제의식
을 갖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학내 단위를 찾기 힘들었다. 특히 총학생회는, 학내 구성원들에 의하여 직접 선출된, 따라서 학내 구성원들의 의견을 가장 정당성 있게 대변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대한 뚜렷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여 유감스러웠다.
길고도 미지근했던 출교 조치 처분 상황의 흐름을 바꾼 것은 지난 8월부터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된, 가해 학생들에 대한 피해 학생의 출교 요구였다. 가해 학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 피해 학생의 요구를 외부의 여러 시민단체들이 성명서 발표 등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점점 사건에 대한 여론의 관심은 학교 측의 미온적인 대응을 비판하는 데로 더욱 집중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가해 학생들 중 한 명이 소속 학과의 다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피해 학생이 본래 문란한 학생이지 않았느냐는 점 등을 담은, 다분히 악의적이고 편파적인 설문조사를 실시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더 나아가 피해 학생 당사자가 한 라디오 프로그램과의 전화 인터뷰에 직접 응하여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면서 상황은 더욱 더 학교 당국을 압박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지난 9월 5일, 결국 학교 당국에서는 가해 학생들에 대하여 출교 처분을 내렸다.
▶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나, 처벌로만 그쳐 버리는 이상 성폭력은 결코 근절될 수 없다. 성폭력은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
당사자 간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다. 성폭력이 강자(주로 생물학적 남성)와 약자(주로 생물학적 여성) 간의 구조적 권력 관계로부터 기인하는 사회 현상임을 상기하고 그 권력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진정으로 성폭력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당장 앞으로의 학내 반성폭력운동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이끌어 나가야만 목표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 낼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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