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10월호 [기 획]찌질했던 나를 말하다
▣ [기 획] 국 가 를 지 목 한 다
국가를 지목한다!
‘일류국방경영’,‘ 강한군대’,‘ 국민의국방’을
반드시 실현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들의 격려와 의견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 국방부 홈페이지의 인사말 중에서
군대에 대한 고민이 끊이질 않지만 국방부에선 이렇게 굳은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일류 국방 경영, 강한 군대, 국민의 국방이라…
고민하고 있는 문제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이 기분.
이 수상한 기분은 뭘까요? 여러분도 느끼셨나요?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요.
그럼 이 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워 주세요.
강한 병사이기 보단, 찌질했다고 고백하는 제대 군인.
입대 전, 폭음이 아니라 여성주의 책을 읽었다는 여성 단체 활동가.
강정마을을 지키려다 해군의 적이 된 평화 활동가.
바로, 이들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찌질했던 나를 말하다
오영식 (수풀) ●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 기억을 걷는 시간
2005년 12월이었던가.
제대한 지 거의 1년 만에 나는 현역병으로 복무했던 군 부대를 다시 찾았다.
후임들에게는 예의상 두 손에 들고 온 피자를 던져 주고 장교들과는 한참을 어색한 안부 인사를 주고받고 나서야 가까스로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생활 공간인 내무반 건물로 들어왔다. 욕실과 화장실, 체력단련장과 으슥한 뒷마당. 사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사람이 아니라 그 공간이었다. 내 생애 가장 길게 느껴던 28개월의 생활 공간, 그 음울한 흔적… 제대한 나에게는 그 공간이 어떻게 다가올지 확인하고 싶었다.
2011년 오늘, 나는 군 부대를 찾았던 그 겨울날의 심정으로 군대에 대한 기억을 돌아보려 한다.
공군 헌병으로 29개월 남짓을 복무하고 얼렁뚱땅 제대한 지 벌써 7년이 지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군대 얘기가 불편하다. 일상생활이 힘들 만큼 고통스러운 기억은 아니지만 군대 생각만 하면 아련한 현기증과 괜한 헛구역질이 치밀 때가 있다. 속된 말로 남자들이 만나기만 하면 수다를 떠는 세 가지 이야기 중 첫 번째가 군대 얘기, 두 번째가 축구 얘기, 세 번째가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라는 건 다들 알고 계실 것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군대 경험도 축구도 좋아하지 않다 보니 남자들끼리의 수다에 공감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내가 민우회를 찾는 건지도 모르겠다.)
축구 얘기는 내가 운동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그러려니 싶지만 도대체 군대에서 고생한 얘기는 왜 그렇게 무한 반복하는 걸까? 훈련 중에 쏟아진 폭우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야삽으로 텐트 주변에 도랑을 판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화장실 바닥타일 하나하나에 치약을 뿌려 손가락만한 칫솔로 물청소 해야했던 경험이 그렇게 재미있을까? 왜 그 고통의 경험을 희화화하는 걸까.
인정하자. 그저 시키면 해야 했던 찌질했던 시절의 무기력한 자화상 아닌가.
♨ 혼란과 두려움의 훈련소
군대, 나는 별 생각 없이 갔다. 사귀던 여자 친구랑 헤어져야 하나, 학교는 어떻게 하나 이런 고민만 했지 군대에서 내가 버텨 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크게 없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게 폭압적 분위기의 훈련소 첫날은 충격, 그 자체였다. 동기 중 누군가는 경기를 일으키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쇼크로 구토를 하기도 했다.
하루 해내기도 힘든데 이 짓을 30개월 동안 더 해야 한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내가 왜 욕을 먹어야 하나 서럽고 화도 났지만 그 상황에서 탈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보니“아, 혼나지는 말자, 튀지 말자, 훈련 잘 받아서 빠지자”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막강한 국가 권력 앞에서 점점 찌질해져 가는 나를 발견했다.
적당히 무난한 훈련병 연기가 익숙해질 무렵, 훈련소 기간이 끝나고 남은 군 생활을 보내게
될 자대로 배치가 되었다. 이때부터가 본격적인 혼란과 좌절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나는 권력자에 철저히 종속된 일방적인 객체로서의 삶을 강요받았다. 지난 20여 년 동안 내 삶의 경험 속에서 자리 잡아 온 관계 맺기 방식, 특히 합의와 협력이라는 소통 방식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공간, 그것이 군대임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아무렇지 않게 적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미 군사화 된 사회생활을 먼저 경험한 사람들은 선행 학습의 영향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형님이라는 호칭도 불편했던 내게 발로 툭 건드리며 팔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TV 리모컨을, 그것도 나의 복종을 시험하려고 일부러 명령하는 듯한 선임을 나는 참아 내기 힘들었다. 그때까지의 내 삶 속에서 쌓아 온 인간에 대한 예의와 원칙이 군대에서 부정당했기 때문에 나는 갑자기 벌거벗겨진 것처럼 몹시 당황했고‘괜찮은 사람’의 반열에서 탈락되는 게 두려워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욕을 먹거나 린치를 당하는 것도 무서웠지만 저 고압적인 선임을 내일도 봐야 하고 지금 이 두려움을 내일 다시 느껴야 할 것이란 사실이 두려워 견딜 수 없었다.
↘ 찌질했던 나를 직면하다
항상 긴장한 채 누가 어깨를 건드리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며 기계어 처럼 관등성명을 외쳐야 하고 일주일 사이에 150명이 넘는 선임들의 얼굴과 이름, 계급과 입대기수까지 줄줄이 꿰어야 하는 압박도 힘들었지만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선임들의 불쾌한 음담패설에 어울려야 하거나 인격적 모멸감을 선임의 신성한 권리로 착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경멸감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었다. 하루는 동기생 중 하나가 선임에게 반기를 들었다. 청소 불량을 이유로 한밤중에 잠을 재우지 않고 4시간 동안 계속된 모욕적인 비아냥, 참다 못한 동기생이 선임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그 사건으로 동기생은 상병을 때려눕힌 이등병이란 딱지를 달고 타 부대로 전속되어 왕따처럼 격리되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몇 명 동기들은 그의 용기를 부러워했다. 화장실에서 밀대 걸레를 질척질척 빨다가 문득 한숨을 쉬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비참하고 찌질한 나를 받아들이는 게 헛구역질이 날만큼 힘들었다.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도 있어야 하는” 일방향적인 강력한 명령 전달 체계. 마치 오징어가 뜨거운 연탄불에 들볶이면서 오그라들 듯 그 압도적인 권력 앞에서 외부 체계와 단절된 나는 무력하게 쪼그라들었다. 그 주눅 드는 움츠림. 그렇다. 내게 군대에서의 경험이란 주눅 듦.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새롭게 서사되는 경험, 그리고 가능성
그러던 중 민우회 주최“반차별 연속 포럼 주체 논쟁-공정한 병역이행, 남자가 말하다”의 패널로 논의에 참여하는 기회가 있었다. 마냥 회피하고 꺼리고만 싶었던 제대 군인이라는 정체성 덕분에 내 경험을 드러낼 기회가 생긴 것이다. 나의 일부이지만 지금껏 회피해 왔던 다양한 정체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기회였다고나 할까. 꼭꼭 숨겨 왔던 불편한 내 정체성을 직면하고 단절적인 경험에 새로운 서사를 부여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나를 긍정하게 하는 과정이었다.
홀가분하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운동의 동력이란게 이런 것이었나 싶다.
앞으로 한국여성민우회에서의 나의 활동, 기대해 주셔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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