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10월호 [기 획] 사실, 나도 아직 답이 없다
▣ 기획 국 가 를 지 목 한 다
사실, 나도 아직 답이 없다
문성훈 (나은) ●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
얼마 전 민우회에서는‘공정한 병역 이행, 남자가 말한다’는 군대를 주제로 한 토론회를 열었다. 반가웠고 내심 기대했다. 열심히 활동하는 군필자 회원이 발제의 한 꼭지를 맡았다길래 기대가 컸다. 생생한 경험담을 들려주지 않을까 싶어서. 심지어 나도 발제 하나 맡겨 주면 왠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들었다.
2년 전에 전역하면서 군 생활을 정리하는 글을 어떻게든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멍석을 민우회가 깔아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글을 부탁받고 덥석 수락했음에도 나는 결국 이리저리 미루고 시간을 보내다 이제야 닥쳐서 글을 쓰고 있다. 대체 왜 그런가 생각했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군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을 짜증이 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토론회에서 든 생각 활동가라는 강박은 잠시 젖혀 두고, 토론회에서 수풀의 발제를 들으면서 처음 생각한 것은 ‘아니, 공군이었단 말야?!’ 물론 시대가 좀 다르긴 하지만 주변에 공군 갔다
온 친구들이 꽤 많았던 나로선 6주마다 꼬박꼬박 휴가를 나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훨씬 낫잖아’라는 생각을 해 왔다. 발제자들의 군 생활 경력을 들을 때마다‘1년 하고 제대했구나’,
‘뭐냐 장교였잖아.’, ‘저 사람은 너무 옛날에 갔다 왔잖아.’,
‘음 결국 가장 최신(?) 정보를 알고 있는 건, 나?’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참 우스웠다.
너 대체, 뭐가 그리 억울했길래 이런 생각을 하는거냐.
개구리 마크를 치고 집에 온 지 2년이 흘렀다. 고백하자면 전역 이후 지금까지 1년에 대여섯 번 쯤 군대 꿈을 꾼다. 레파토리는 늘 똑같다. 전역을 며칠 앞두고 말년 휴가를 나가야 하는데 못 나가게 되었거나, 휴가를 나왔다가 부대에 복귀해야 하는데 눈떠 보니 집이어서 졸지에 탈영병 신세가 되었거나. 왜 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냥 의식 저 밑바닥 어딘가에서 아직도 켕기는 게 있구나 짐작할 뿐. 게다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그랬고, 내년과 내후년에도 나는 1년 중 2박 3일을 군복을 입고 입영해야 한다. 예비군 훈련 받으러 가는 민우회 활동가.
신선하지 않은가? ㅡ.ㅡ
어쨌든 토론회 발제자로 나선 분들은 진지하게 자신의 고민과 논의를 제출했지만, 나는 뒷구석에서 과거로 과거로 돌아갔다.
전방GP 총기 난사 사건 이후로 아주, 조금, 달라진 듯 했던 육군. 서른 줄을 바라보는, 중대장과 비슷한 연배에 겨우 작대기 하나를 달고 이등병 생활을 시작한 나. 대체 왜 계급 이름이 ‘이등’병인 거냐고.‘ 이등 시민’을 의미하는 것 같아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군대하면 떠오르는 기억
모든 사람들의 말마따나 참 늦게도 입대한 나는 변질되지 않겠다는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입대 직전에『대한민국은 군대다』와 『페미니즘의 도전』같은 책들을 열독하고 들어갔다. 덕분에 2년 내내 참으로 정신적으로 피곤하게 지냈다.
신병 훈련을 받는 기간 동안에는 의외로 군대도 합리적인 구석이 있다는 착각을 잠시 했지만,
2년을 보내게 될 자대에 가면서 참 별꼴 다 겪었다.
내가 처음 중대에 배치됐을 때, 병장 말고는 세탁기를 쓸 수가 없었다. 여러 사람이 많이 쓰면 세탁기가 빨리 고장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였지만, 실은 중대원 모두가 시간이 흘러 짬밥이 차면 마치 게임에서 미션클리어, 레벨업하듯 ‘풀리는 것’이 늘어가고 누리게 되는 것이 많아지는 시스템에 순응한 결과였다. 간부들 모르게 쉬쉬하면서 병사들끼리 만들어 놓은 계급 세계가 있다.
병장쯤 되면 짬밥이 맛없다고 밥 먹으러 가서 몇 숟갈 뜨지도 않는다. 일, 이병들은 그가 밥을 다 먹기 전에 미리 밥을 다 먹어야 한다. 고참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 덕분에 늘 배가 고팠다. 모든 장난과 심부름은 있는 대로 받아 주고 생활관에서는 로봇처럼 기이한 자세로 각 잡고 앉아 있어야 하고 청소군기라는 희한한 게 존재해서 청소를 한다는 명목하에‘푸닥거리’를 하고. 겪어 보지 않은, 듣는 사람은 듣는 사람대로 참 재미도 없고 이해도 못할, 말하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대로 얘기할수록 힘빠지고 떠올릴수록 짜증 나는 것이 수십, 수백 가지는 된다.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조차 누군가의 눈치가 보이고, 언제 어디서 고함과 욕이 날아올지 몰라 안절부절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니. 너무 다행스럽게도 나는 동료 병사들과 범접할 수 없는(?) 나이 차이가 나서‘잘 돌아간다’는 평가를 얻자마자‘형 대접’프리미엄을 얻은 데다 사회에서 고민하던 것이 있어 괴롭기는 해도 그럭저럭 내 자아를 조금 건질 수는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 고등학교 갓 졸업하고 혹은 20대 초에 들어온 병사들은 이 희한한 세계
(그러나 군사주의 사회를 생각하면 너무나 상식적인)에 점점 적응해 갔다. 나는 어둠의 시대를 찢어 버릴 혁명가의 마음이 되어‘상병만 되면 이 모든 것을 혁파하리라’고 불끈 다짐하며 친한 고참들과 후임들을 설득, 교화하려 애썼지만 변화는 쉽지 않았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저 유명한 말처럼 나중에 우리가 밥이 차면 다 바꿔 버리자고 불끈 다짐하던 동기들과 후임들은 어느새‘계급에 맞게’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변화는 쉽지 않았다.
어제의 성추행 피해자였던 친한 동기 녀석이 오늘의 가해자가 되는 것을 보면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답이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분량을 거의 다 채운 이 시점에 한숨만 푹푹 나오고 더 이상 글이 나아가질 않는다. 토론회 사회를 본 박봉 대표가“군대 얘기는 재미는 없는 것 같다”는 말을 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역시 재미는 없다.
이 글도 마찬가지고.
군 가산점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넘어서기 위해서, 제도 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동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남성들의 군대 이야기를 좀더 끄집어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필요하다. 그렇지만 당장 나부터도 여전히 똑같이 군대를 다녀온 친한 친구가 아니면,
특히 여성들에게 군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꺼려지고 불편하다. 이 마음의 꺼림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막상 얘기를 풀자면 꺼낼 것은 많은데 왜 또 꺼내 보기는 싫은 것일까.
전역만 하면 이 문제를 붙들고 공부를 해 볼까, 동기와 고참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해 볼까 마음도 먹었는데, 왜 전역하자마자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군대라면 돌아보기조차 싫었을까.
모르겠다.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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