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10월호 [문 화 산 책] 마당을 나온 암탉아, 너를 위해 날아봐!
▣ 문 화 산 책
마당을 나온 암탉아, 너를 위해 날아봐!
박지숙 ● 동화작가
「마당을 나온 암탉」이 애니메이션으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다.
국내 동화로는 드물게 백만 부를 찍어낸 베스트셀러이다. 이 책에는 알을 품고 싶어 하는 암탉, 잎싹이 나온다. 그러나 잎싹의 현실은 그 꿈과 거리가 멀다. 자신이 낳은 알은 낳자마자 주인이 가져가 버리고 얼마 후에는 폐계로 찍혀 구덩이에 버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청둥오리인 나그네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지만 마당을 나온 그녀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잎싹은 찔레덤불 속에서 알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잎싹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잎싹은 주저 없이 자신의 알처럼 낯선 알을 품게 된다. 그건 바로 청둥오리의 알이었다.
그때부터 잎싹은 청둥오리의 엄마가 되어 눈물겹게 청둥오리인 초록머리를 지켜 낸다.
그 덕에 초록머리는 잘 자라 하늘을 날 수 있는 진짜 청둥오리가 된다. 하지만 그 둘의 만남에서 예견됐듯이 청둥오리 떼가 저수지에 나타나면서 초록머리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런 초록머리를 잎싹은 말없이 보내 준다. 마치 장성한 아들이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집을 떠날 때처럼 가슴 아파하면서 말이다.
이 책에서 보여 주는 잎싹의 모성애와 희생은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희생이다. 거기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이 없다. 그리고 그 희생을 보면서 우리는 자신을 키워 준 부모님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잎싹의 그 끝없는 희생이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아주 닮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는 어떤 엄마인가? 나의 모성애는 어느 정도인가?라고. 나는 아무래도 이쪽에는 낙제점이 될 것 같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누구 못지 않지만 이 책의 잎싹이나 친정엄마처럼 무조건적인 희생을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첫 아이를 가져 만삭이 되었을 때 나는 남편의 발령지를 따라 전주로 내려왔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 나는 아이를 키웠다.
나는 그 아이를 위해 나의 직업도 나의 꿈도 다 포기한 채 아이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
장마철에 아이의 보송보송한 엉덩이를 지키기 위해 기저귀를 다림질까지 하며 키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는 모래로 만든 사람처럼 내 자신이 허물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아이는 튼튼하게 잘 자라주고 남편은 회사를 잘 다녀 주었는데 나는 끊임없이 갈증이 나는 탄탈로스처럼 입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이대로 영원히 아이에게 매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까 봐 조바심이 났다. 다시 둘째가 태어났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더 바빠졌다. 그리고 첫 아이가 학교에 가고 둘째가 유치원에 갔을 때, 나는 드디어 내 자신을 찾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동화의 세상을 알게 되었고 그 공부를 위해 열심히 책을 읽어 나갔다. 도서관도 자주 찾았고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도 깨닫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마음의 안정도 찾게 되었고 운 좋게도 일자리도 얻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일도 하고 밤에는 글을 썼다. 물론 일과 글쓰기 때문에 엄마 노릇은 잘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도 그건 현재진행형이다. 아침밥도 잘 챙겨주지 못할 때도 많으니까. 하지만 나는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 최소한 내가 모래인간처럼 느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TV나 대중매체 속에서 성공한 젊은이를 소개할 때마다 그들 뒤에 잎싹과 같은 엄마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줄 때는 마음이 영 불편하다. 그들의 강한 모성애와 희생이 내 상상을 초월할 때 상대적으로 초라한 내 모성애를 자책하게 되고 무능력한 엄마라며 탄식을 한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부족한 엄마로 남아도 되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아이들에게는 더욱 미안해지고 구멍 난 엄마역할 때문에 아이들이 성공하지 못할까 봐 걱정도 든다.
하지만 다시 그들을 냉정하게 보면 다른 이면이 보인다. 태양이 찬란할수록 그림자가 더욱 길게 드리우듯 자식의 성공 뒤에는 그 엄마들이 포기한 수많은 꿈들이 희생되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희생을 딛고 세상의 꼭대기에 오른 아이가 초록머리처럼 잎싹을 떠나더 큰 세상으로 가버리고 홀로 빈 둥지 속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의 외로움은 그 어떤 외로움보다 훨씬 더 깊었으리라.
하지만 방송에선 그것을 ‘아름다운 희생’이라고만 포장 할 뿐 더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21세기가 된 이 시점에서도 희생적 모성애는 각광받고 있고 현재 여성들을 흔들어 놓는다. 아니 요즘에는 모성신화를 상업적으로 훨씬 더 잘 이용하고 있는 듯도 하다.
모성애를 간판으로 들고 나오는 연극이나 영화 그리고 책들이 여전히 많은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 환경 탓일까,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자신의 꿈을 접고 아이를 위해 올인하는 엄마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은 온갖 학원 정보와 입시정보를 꿰고 하루 일과를 아이의 스케줄에 맞춰 산다. 게다가 그들은 나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한다.
‘너 그렇게 아이 키워서 성공시킬 수 있겠어?’라며.
그런데 그런 불안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나로 돌아와 뻔뻔하게 내 일을 한다. 왜냐고?
나는 다시는 나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블랙홀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당을 나온 암탉의 뒤를 따를 수가 없다. 그녀를 보고 울 수는 있지만 그녀처럼 살 수는 없다. 대신 나는 아이에게 내 꿈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엄마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럼 언젠가 아이도 내 뒤를 따라 날아오르고 있지 않을까? 나보다 더 높이 말이다. 그럼 우린 둘 다 행복한 비행을 할 수 있을 거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마당을 나온 암탉의 최후가 아쉽고 가슴 저리다. 단 한 번이라도 그녀가 그녀만의 꿈을 위해 초록머리와 함께 나는 연습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둘의 행복한 비행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