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10월호 [나의 삶 나의 이야기] 나의 삶 나의 할머니
▣나의 삶, 나의 이야기
나의 삶 나의 할머니
화정(빠른거북이) ●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몇 주 전, ‘나의 삶 나의 이야기’라는 주제로「함께가는 여성」에 실을 글을 써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워낙 말하고 글쓰기를 좋아하여 일단“너무 좋아요!”하고 대답을 하긴 했는데...
막상 마감 날짜가 닥쳐 쓰려고 하니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막막해진다.
올해 서른이고, 학생이다. 학교 졸업 후, 천직이라 생각했을 만큼 적성에 꼭 맞는 사교육 시장에서 수학 강사를 했다. 지금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결심으로 시작한 여성학 공부가 이제
4년차에 접어 들었다. 아무런 준비도 계획 없이 시작했던 공부여서인지 힘들어서 눈물도 많이 쏟아 냈다. 우울증 때문에 한 시간을 멍하니 옷걸이만 쳐다보며,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다시‘살아 보자!’고 다짐했던 순간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성으로서의‘나’와 평소에 느끼게 되는 셀 수 없는 차별적 문제들을 학문으로 배우며 공부한다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알았다면‘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텐데’하는 후회도 일 년에 한 번씩 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살면서 내린 결정 중에 가장 잘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공부를 시작하고 잃어버렸던 뜨거운 열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2000년 여름. 그때부터 나의 열정, 나의 희망은 완전히 없어졌다.
사라져 버렸다.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 처럼…
태어난 순간부터, 바쁜 엄마와 아빠 덕분에(?)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집과 관련된 모든 기억에는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할머니는 삶 자체였다. 할머니는 친구고 든든한 지원자였다.
할머니의 따뜻함과 무한한 애정 덕에 다소 거칠고 퉁명스러웠던 성격도 꽤나 부드럽게 순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아빠가 장모님(외할머니)을 대하는 태도가 엄마가 친할머니(시어머니)를 대하는 태도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아마 그때부터 사회에 만연한 여성의 위치와 차별적 문제들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평생 함께할 것 같았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사고가 생겼던 그날, 할머니와 단 둘이 함께 있었다. 그리고 돌아가시던 때에도, 학원에서 전화를 받고 황급히 뛰어온 내가 할머니를 부르자마자 세상을 떠나셨다.
그날 후, 매일 울었다. 밤에 잠들면 베개를 다 젖도록 눈물 흘리고, 길을 거닐다가, 버스 창문에 기대다가도. 불쑥불쑥 할머니 생각이 날 때마다 나는 점점 가라앉았다.
잘해 드리지 못한 죄책감과 평생 딸집에서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분께 큰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한 자책감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 드라마, 음악, 영화 등등. 어떤 상황에서든 ‘할머니’를 떠올리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러면서 나를 잃어 갔고, 열정도 따뜻함도 잃은 채 의욕 없는 뾰족한 인간으로 숨만 쉬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나’ 아닌‘나’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는 할머니도 원치 않으실 것 같았다. 다시 자랑스러운 손녀가 되고 싶었다.
할머니는 항상 나의 모든 점을 자랑스러워하셨다. 그게 내 자존감과 자신감의 원천일 것이다.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배웠다. 특히, 여성 노인 문제에 관한 수업 시간에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나’에 대한 탐구로 시작했던 공부는‘여성’ 전체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지금은 예전에 할머니가 자랑스러워하셨던 -언제나 호기심 많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일단 부딪쳐보는 열정적인- 아이가 되었다.
지금도 할머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다.
아직도 책상 곁을 지키고 있는 할머니의 작은 사진에도 금방 눈물을 쏟아내는걸 보면….
그러나 종종 느낀다. 할머니가 따뜻하게 바라보시고, 어려울 때면 도와주고 지켜 주시는
기운을.
‘나의 삶, 나의 이야기’는 모두 할머니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가치관, 사고방식, 인격 형성의 99.9% 영향을 끼친 분이 할머니다. 그래서 한 번은 입 밖으로 풀어 내야 가벼워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해 왔다.
이번 기회로 어쩌면 조금, 아니 생각보다 많이 마음의 짐을 덜은 것 같다.
민우회「함께가는 여성」에 다소 무겁고 우울한 이야기로 페이지를 할애했지만!
I’m so sorry but I love you~ 민우회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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