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12월호 [민우 ing] 반(反)성폭력 운동
▣ 민우ing
반(反)성폭력 운동,
물음표를 차근차근 풀어 갑니다
- 2006~2010년 상담 사례 분석 토론회를 마치며
최김하나(하나)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총 5,785회의 상담 진행과 3,340명의 내담자. 그중 성폭력에 관한 상담은 2,949명과 5,354회 진행. 지난 2006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5년 동안 진행해 온 상담 활동의 단편적 수치입니다. 그간 상담소의 상담 활동은 매년 초 회원 소식지와 홈페이지 게시글을 통해 전년도 상담 활동에 대한 통계 수치와 상담원들의 고민 몇 가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공유가 되었지요. 2011년에는 그 내용을 한데 모아 분석하고 그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상담소 활동을 전망해보는 참으로 창대한 사업을 계획하였으니 이름하여‘2006~2010년 상담사례분석 토론회 - 5,785개의 물음표를 풀다’입니다. 토론회는 지난 11월 8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80여 명에 달하는 참가자들의 열띤 성원에 힘입어 잘 진행되었습니다. 그 자리의 열기가 슬슬 가물가물한 당신에게, 혹은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과 궁금함을 안고 있을 당신에게 토론회의 엑기스만을 추출하여 안겨드리는 빵빵한 A/S 글입니다.
이 기획을 대체 누가?!
5,785개의 상담 일지를 죄다 꺼내어 통계를 재정비하고 일지를 검토한 뒤, 수차례의 논의를 거쳐 분석과 고민을 담은 글을 발제문으로 내어놓기까지 장장 7개월이 소요되었습니다.
‘처음 이 기획을 제안한 것이 대체 누구냐’며 갈 곳 없는 원망도 간혹 등장했지만, 애초 토론회의 기획은 반(反)성폭력 운동에 대한 상담소 활동가들의 고민과 답답함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5년 전에 비해 우리 사회에서‘성폭력’이라는 단어를 접하기는 매우 쉬워졌고, 성폭력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인지도 역시 기대 이상으로 높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현실의 변화가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것이지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핵심적인 고민을 추려 발제문에 담은 내용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이는 또한‘반성폭력 운동이 담고 있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은 무엇인가’에 대한 활동가들의 당면 과제 이기도 하고요.
첫째, 아동 성폭력 관련 정책을 중심으로 한 국가 감시권 강화 흐름이 성폭력에 대한 사회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평가하고, 국가 주도의 성폭력 대책 속에서 어떤 활동을 만들어 가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지난 5년간 특정한 아동 성폭력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여론을 의식한 정부는 전자 발찌나 신상 공개 제도를 비롯한 강경 처벌책을 내놓는 것에 주력해 왔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사회적인 낙인과 강력한 처벌을 통해 일부 가해자의 범행을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성폭력에 대한 성별 권력의 문제를 제기했던 반성폭력 운동의 문제의식과 다르다는 이유로 상담소는 이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채 대응 활동을 계획하는 것을 유보해왔지요. 하지만 이러한 정책 흐름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것으로 전망되어, 그에 대한 제동을 거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 움직임은 결국 차별적인 성 문화와 성별 권력관계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성폭력 예방 대책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시금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장기적 안목과 계획은 강경 처벌 정국을 파고들어 균열을 내지 못한 채 계속 끌려 가고 있다는 무력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지향점과 현실 과제 해결이 맞물려 진행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과제를 발굴하고 모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성폭력 개념이 법률 안에 갇혀 일상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과 공동체 해결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2차 가해’및‘피해자 관점’의 과잉 해석에 따른 한계점을 살펴보면서‘성폭력 사건의 해결’과정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하는 것입니다.
그간 성폭력 특별법을 제정, 개정하는 등의 법제화 운동을 통해서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근거와 사회적 공감을 이끌어 낸 성과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성폭력의‘폭력성’을 강조하게 되면서 성폭력이 발생하는 맥락에 있어 여성의 다양한 경험을 드러내지 못하는 문제와 법적 처벌 외의 다양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기도 했지요. 그리고 공동체 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논의되는 방식이 개별 사안의 맥락을 고려하기보다는 관련 규정 해당 여부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핵심을 벗어난 논쟁이 발생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여성) 피해자가 자신의 차별과 폭력 경험을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언어 만들기를 모색하는 것과 동시에 궁극적으로 성폭력 문제의 해결이 지향하는 바에 다시금 주목하여 개인과 집단 문화의 성찰을 통한 근본적인 예방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성 규범 속에서 여성의 경험을 해석하게 되는 조건들을 살펴보며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규범을 해체하기 위한 새로운 담론을 발굴해야 한다는 고민입니다.
여전히 여성의 성 경험에 대한 이중적 잣대가 강력히 작동하고 있고,‘ 성폭력 피해자 유발론’격의 통념이 성폭력 피해자들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현실 속에서 여성 스스로의 내면화된 성 규범이 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리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염려도 됩니다.
그러나 사회 문화적 배경을 바꾸기 위한 다양한 활동과 더불어 여성이 스스로의 경험을 해석하고 언어화하는 과정의 주체로 서는 것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관계의 변화에서 오는 고통을 설명해 내는 다양한 언어를 모색하고, 성폭력을 성적 수치심의 여부로 판단해 왔던 관행을 해체하고, ‘성경험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운 여성’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물음표를 향해
이러한 고민의 바탕에 바로 내담자와 활동가들의 5,785개의 물음표가 있습니다. 발제문은 위의 세 가지 고민과 함께 5년간의 상담 통계 중 주요 내용을 분석하고, 일지를 통해 드러난 몇 가지 주목할 경향을 살펴보는 것 또한 포함 되었지요. (자세한 내용은 토론회 자료집을 읽어보시길!)
덧붙여 상담소의 분석과 고민은 다섯 분의 토론자들께서 보태어 주신 알차고 진지한 고민 덕에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홍성수 님은“반성폭력 운동 진영에서 일궈 온 법적 성과가 실질적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는가 하는 점을 살펴봐야 하는 시점이며, 작은 것들의 정치를 복원하기 위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권김현영 님은“피해자를 어떻게 운동의 주체로 만들어 낼지에 대한 전망의 부재 속에서 반성폭력 운동 진영이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역할에 대한 권위와 정당성마저 감소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제시하셨습니다.
조지영 님은“공동체 내 해결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같은 개념들이 단순히 명문화 된 규정 속 단어가 아니라, 활발하고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구성원들의 이해와 인식을 하나로 모아 가는 과정 속에서 다시 한 번 재정립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김영란 님은“반성폭력 운동의 출발 지점에서 사회 변화를 주도하던 운동 중심의 활동과 개별 피해자에 대한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이 마치 차원이 다른 일처럼 인식되면서 서로 간의 연대와 신뢰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성폭력 상담이 무엇인지, 성폭력 상담소에서 이뤄지는 상담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짚어 주셨으며, 이윤상 님은 “성폭력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우리 운동에 맞는 ‘상담과 지원’의 내용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다시 점검하고, 보다 과감한 시도를 단행해야 하는 때가 아닐까 싶다” 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한걸음씩 앞으로!
지금까지의 상담 활동을 통해 진전시켜 온 고민을 돌아보고 당면 과제가 무엇인지를 살폈으니, 이제 할 일은 조금 덜 망설이고 조금 더 과감하게 반성폭력 운동이 지향하는 가치를 구체적인 활동으로 실현해 나가는 것이겠지요. 갈길이 멀어 보이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 위안이 되는 동시에 긴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바심 내지 않고 이 순간 또 한걸음을 떼는 것의 소중함을 잊지 않고 잘 해보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고 함께 해 주세요. 호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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