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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12월호 [민 우 칼 럼] 죽어가는 자의 고독 vs 살아남은 자의 슬픔
▣ 민 우 칼 럼 창
죽어가는 자의 고독 vs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박건 ● 한국여성민우회 정책위원
Scene #1
직장(直葬)은 장례절차 없이 곧장 화장장으로 직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의 경우 연고가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유족이 장례를 거부한 경우에 행해지게 된다. 한국의 경우, 고독사로 사망에 이른 사람의 통계는 없지만, 70살 이상 1인 가구가 79만3000가구이기 때문에이 79만3000가구의 상당수가‘고독사’잠재 위험군이라는 신문보도가 있었으며, 작년에 일본의 유품 정리 회사의 한국 지사까지 설립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단어의 기원은 옆나라 일본이다. 일본의 경우 2010년 NHK 「무연사회: ‘무연사’3만2천명의 충격」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홀로 살다가 무연사(혹은 고독사)에 이른 노인들을 방송으로 보도하면서 전국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으며, 「고독사」라는 동명의 소설이 영화화되었다.
Scene #2
오랜 투병 기간 동안 헌신적으로 동성 파트너를 간호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고인의‘가족’들로부터 장례식장에서 배척당하고, 화장이 끝난 이후 고인을 보내는 길에‘너는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가족끼리 가기로 했다는 이유’로 함께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가족 중심의 사회제도와 문화는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강고하게 지탱되고 있기 때문에, 그 제도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은 철저하게 고립되게 된다. 또한 그런 의미로 죽음 앞에서 우리는 가족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끼게 되고, 여러 가지 이유로 그런 의지처를 구할 수 없게 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회의 동정 어린 시선 뿐만 아니라 본인들도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해 자연스러운 느낌을 갖게 된다.
죽음이라는 것은 떠나는 사람의 몫이기도 하지만, 남겨진 사람의 몫이기도 하다. 떠난 사람은 비록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그 후에 자신이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를 상상하고, 남겨진 사람은 떠난 사람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나 한번은 죽음과 조우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도 사회적인 관심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현상과 신조어의 등장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죽음의 사이클을 피할 수 없고, 죽음이라는 것은 홀로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독사니, 무연사니 말을 하는 것은‘가족의 돌봄 속에서 죽는 일이 행복하고 바람직한 일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데, 생각해 보면 가족의 돌봄은 이미 간병인의 돌봄으로 변화 되었고, 가족이 하는 일은 돈을 지불하고,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최선인 상황으로 변화하고 있다. 친밀성이 상품처럼 거래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거니와, 이처럼 돌봐 줄 사람이 없거나 돈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사회적인 수준에서 간병을 제공하면 되는 일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에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사회적 비용을 개인이나 가족에게 떠넘기기 위함이 아닐까?
자신의 집 등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혼자 살다가 어느 날 영면에 들어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것에 대한 절차 역시 사회적으로 밟으면 될 일이다.
지역 사회 자체적으로 네트워크를 잘 갖추고 혹시 이른바 고독사가 예상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꾸준히 우정과 애정의 관심을 갖추도록 체계를 만드는 일이 요구될 뿐이다. 그리고 그
체계 속에서도 홀로 돌아가시는 분들은 더 이상 무연사도 고독사도 아니다. 가족이 없이 죽었다고 해서 무연사니 고독사니 이름을 갖다 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고독사’는 1인 가구나 싱글족의 증가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그리고 개인과 사회의 네트워크의 문제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이 타인 및 사회와 개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연결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이지, 싱글족의 증가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는 순간을 함께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죽음 이후 자신의 유품이나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하는 점이 더 걱정스럽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임종 노트니 유품 정리 회사니 하는 것의 탄생은 이러한 걱정에서 비롯되었다.
가족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근거한 고독사를 지탱해주는 환상은 가족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월한 연대의 틀이 될 거라는 환상,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자기 최면이다. 가족들이 고인의 장례를 거부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은 이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 중심적인 장례 문화 혹은 죽음 문화는 우리 사회에 완벽하게 내재되어 있다. 앞선 사례에서 보았듯이,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헌신적으로 간호했던 파트너가 모든 것에서 제외 되는 사태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가족 중심적인 사회라는 것을 보여 준다. 비록 유족은 가족이 아니어도 될 수 있지만, 가족 중심의 서열 구조에서 당연히 뒤로 밀릴 수밖에 없으며, 절차의 논의나 의례에 파트너나 친구는 참여조차 할 수 없게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유족인 가족이 거부한다는 이유로, 평생을 같이 살아온 파트너 혹은 친구가 아예 유령취급당해도 어디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그런 사회가 오늘날의 한국 사회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인연만큼 개인의 선택으로 맺은 인연도 법적으로 보장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개인의 죽음에 대해 사회적인 책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사회나 지역 공동체에 맡겨 놓을 수 있는 부분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가는 길이 기억되기를 원하고, 또 누군가를 기억하기 원하는 바도 있기 때문이다. 가족 제도를 벗어나서 우정과 애정에 연대한 상호 부조 시스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점의 근거는 여기에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만큼은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보다도,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사람들이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친밀성에 근거한 연대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따라서 기존 가족 제도로 묶이기도 싫고, 묶일 수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가는 길을 서로 따뜻하게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고독사니 무연사니 하면서 기존 가족제도를 더욱 더 공고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은 단어들을 미리 차단하고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가꿀 수 있지 않을까? 성인들끼리 맺는 양자 인연을 매우 간단하게 (결혼하지 않은 경우에도) 맺을 수 있게 한 일본의 경우에는 우에노 치즈코가 말하는‘양자 100명 갖기 운동’을 하여 친구끼리 양자가 되어서‘가족’처럼 지켜 주고 대우받는 꼼수를 부릴 수도 있을 것이다. 꼼수를 부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부려야 한다면 기꺼이 부릴 수는 있을 것 같다.
우리의 꼼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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