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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12월호 [나의 삶, 나의 이야기] 내가 캐디였던 날들
▣ 나의 삶, 나의 이야기
내가 캐디였던 날들
그루 ●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나는 여러 직업을 거치며 많은 경험을 쌓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늘 일을 최대한 즐겁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 중에서 골프장 캐디로 일했던 경험을 적어보고자 한다.
대학교 동아리로 탈춤패를 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직업 풍물인 으로 고되지만 행복한 생활을 몇 달 살았다. 그러다가 IMF외환위기가 터졌고 급격히 기울어진 집안 형편을 외면할 수 없어서 고심 끝에 풍물패 사부님들께 잠시 쉬겠다고 말씀드린 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다. 친한 동아리 언니가 학교를 일 년 휴학하고 골프장에 들어가 등록금을 벌어왔던 것이 생각났다. 그 언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는 (세간에 골프장 캐디는 2차를 나간다는 말이 있었다. 물어봤더니 적어도 본인이 아는 한 골프장에서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스물세살부터 경기도 여주의 한 골프장에 들어가 캐디를 이년 반 정도 했다.
일을 즐기기까지
처음 육 개월 동안은 일이 끝나고 기숙사에 돌아가면 몸과 마음이 무척 힘들어서 매일 울었다.
정말이지 초보로 보이는 캐디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 평생 대접만 받으며 살아온네 사람을 캐디 한 명이 한꺼번에 보조해야 했다. 골퍼들은 아직 골프장 코스에 익숙하지 않고 거리를 재는 것에 미숙한 캐디는 말 그대로 깔아뭉갰다. 골프채를 양 옆구리에 몇 개씩 끼고 (그때는 전동카가 캐디 생활 일 년 정도 되어야 운행 테스트 후 주어졌다) 18홀을, 주말에는 36홀을 죽어라 뛰어 다녔다. 그러면 라운딩 도중 다리에 쥐가나서 병원으로 실려 간 적도 있다. 첫 티업1)이 해 뜨는 시간이어서 해가 길어진 여름이면 한 달 동안 매일같이 새벽 네 시 이십분까지 골프장으로 올라가 대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못하겠어…’생각만 할 뿐 엄청난 경제적 위기를 맞은 집 형편을 생각하면 말로 꺼내놓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집을 나서는 나를 따라 나오셨다 뒤돌아서서 눈물을 감추셨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육 개월을 고생한 후,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캐디로써 일을 잘 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버는 족족 집에 보냈지만 형편이 나아지려면 한참 멀었기에 풍물패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접고 즐기면서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때부터는, 일이 즐거워졌다. 어떻게 즐기면서 했냐하면, 거의 대부분에 골퍼들이 캐디의 경력을 묻는다. “저는 3년 됐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면 아마추어골퍼들은“오!”하며 흡족해한다. 캐디들은 이직률이 매우 높아서 보통 샐러리맨들에게는 거의 초보캐디가 배정되기 때문에 실력 있는 캐디를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박세리처럼
재밌었던 일화를 몇 가지 소개하자면, 그 당시 박세리 선수의 활약상이 대단했고, 많은 골퍼들이 박세리가 치던 골프공과 골프채를 즐겨 쳤다. 많은 분들이 기억할 것이다. 박세리가 연못에 공이 빠지자 벌타 수를 줄이고자 신발과 양말을 벗은 채 연못으로 들어가 공을 쳐내 한 타를 줄인 적이 있다. 내가 일하던 골프장에도 연못이 곳곳에 있었고 골퍼들의 공이 많이 빠졌다. 골퍼들은 일단 공이 빠지면 신발부터 벗었고, 나는 말리느라 정말 진땀을 뺐다. 연못이 무척 깊어서 큰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여주 옆, 이천의 조직폭력배들이 팀을 꾸려 골프를 하러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이 년 경력이었던 나는 보스가 있는 첫 번째 팀에 배정이 되었다. 인사를 드리고 일을 시작하려는데 소위 말하는 넘버 2,3,4 멤버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언니(캐디를 언니라고 부른다)는 오늘 일하지 마세요. 저희 형님은 여자가 힘든 일하는 것 싫어하십니다.”
“괜찮습니다. 이것이 제 일 인걸요.”
“아닙니다, 저희가 다 알아서 합니다. 그래야 저희가 혼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날은 운전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넘버 2,3,4는 형님이라는 사람이 친 공을 찾아 헤매며 채를 갖다 주느라 뛰어다녔고, 형님이 어떻게 공을 쳐도“형님, 굿 샷 입니다!”를 연신 외치며, 정작 본인들은 공을 대충 쳤다. 정말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골프를 몇 타 치냐는 골퍼들의 질문을 많이 받아서 ‘아, 나도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에 일이 끝나면 연습장에 가서 친한 언니들과 공을 쳤다. 어떻게 공을 쳐도 서로 “굿 샷!” 을 날려주면서 배가 아플 정도로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의 그 즐거움 때문에 결심했었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꼭 골프를 배우겠다고!
골프장엔‘골프’만 있는 게 아니더라 지금 드는 생각은, 꼭 한번은 예전에 일했던 여주의 금강 컨트리클럽에 가보고 싶다.
허겁지겁 국수와 샌드위치를 먹었던 그늘집 (4홀마다 있는휴게소)이 그대로 있을지가 궁금할 뿐, 골프를 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접대 하면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가 골프이기도 하고, 홀인원3)을 하면 골프장에 식수를 하고 골프연습장의 모든 사람들에게 밥을 한 끼 사야 하는 등의 잘못된 골프 문화에 일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어서다. 물론 골프는 건강과 체력 단련에 좋은 운동이기도 하지만 돈을 많이 들이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다른 운동도 많다. 골프는 배우지 않으련다.
캐디 생활 이 년 반 동안, 많은 것을 배웠는데 그 중 하나가 사회 부조리였다. 이십대 초반, 골프장을 찾은 장관급 공무원들이 고 정주영 회장에게 배꼽인사 하는 것을 보면서, 날아 온 골프공에 맞아도 산재 처리를 할 수 없는 동료 캐디들을 보면서, ‘아, 이 사회가 뭔가 잘못됐다’라는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물다섯부터 시민 사회 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니 캐디로 일한 경험은 내게 귀중한 선물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고된 날들을 이제는 즐겁게 회상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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