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4월호 [민우ing] 성평등복지국가가 온다
▣ 민우ING
성평등복지국가가 온다
권박미숙(먼지) ● 성평등복지팀
사실 총선에 무슨 관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거리마다 무례하게 울려대는 선거로고송에 아침의 평화가 깨지는 것을 느끼고, 뿌려지는 명함을 보며 종이 낭비를 생각하고, ‘여러분의 일꾼’이라는 둥, ‘깨끗한 정치’라는 둥, 좋은 말만 갖다 붙여 결국 하나마나한 얘기를 만들어내는 말의 낭비가 피곤한 나 같은 사람이 말이다. 이런 이유들로 내게 선거는 오히려 스트레스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투표권이 생긴 지도 어언 십여 년. 몇 번의 선거를 거치면서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선거를 우습게 봤다가는 그 이후 몇 년간을 훨씬 더 강도 높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듣도 보도 못한 엄청난 액수의 세금이 고즈넉한 하회마을 앞 강가에 콘크리트 바르는 일에 쓰이는 꼴, 있는 걸 없애도 모자랄 판인 군대를 더 짓겠다고 제주 앞바다에 폭약 터트리는 꼴, 그 많은 사람들이 마음과 몸을 다해 표현하는 반대의견이 무참하게 물대포를 맞는 꼴, 성희롱 발언이나 찍찍하고 다니는 국회의원에게 ‘차마 돌을 던지지 못함’으로서 그 놈이 그 놈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국회의원들의 꼴. 선거를 우습게 봤다가는 4년 내내 이런 꼴들을 보며 수명이 단축되는 것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실을 받아들이는 담대한 마음으로 이번 4.11 총선에 관심을 가져 보자면, 맞닥뜨리게 되는 새로운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복.지.국.가.
복지국가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북유럽 나라들에서 흘러나온 환상적인 소문들이다. 거긴 유학생도 학비 안낸다더라, 여름휴가를 한 달씩 간다더라, 무슨 치료를 받든 병원비는 똑같다더라, 등등. 그런데 바로 그걸 한국에서 해보겠다고 정치인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표현의 자유조차 위태로운 이 나라에서 이런 꿈같은 일들을 해보겠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그렇다. 상상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못 믿어버리고 말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다. 결국 무상급식이 시행되고 있다거나, 서울시립대학교 등록금이 절반이 되었다거나 하는 일들. 북유럽 나라들의 소문에 비하면 시시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지만 내일을 기대하게 한다는 점에서 묵직한 증거들.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다. 교육감이 하나 바뀌고, 지방자치단체장이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신기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그러니까 선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어쩌면 선거란 게 손해를 막기 위해 택하는 차악이 아니라 내게 이익을 줄 수도 있는 차선 정도는 될 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나 곧 알게 되었다. 이 증거들은 대표가 바뀐 덕분에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인과관계일 뿐이라는 것을. 진짜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은 아름답게 살기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 이런 소망들.
'나에게 복지국가는 턱이 없는 평평한 길과 같다. 턱이 없는 길은 교통약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누구나 걸을 때 편하게 걸을 수 있다. 모두가 손을 잡고 함께 말이다.'
'나에게 복지국가란, 국민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마음속에 꺼려지는 게 없는 국가. 돈이나 학벌, 가정형태, 성향 등등 스스로 느끼는 장애물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나에게 복지국가란, 내가 사회의 부품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인간답게 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이다.'
'나에게 복지국가란, 그럭저럭 살아도 살만한 나라. 생계에 대한 두려움을 노동의 동력으로 삼지 않는 나라. 미친 듯이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만하고, 아주 잘나지 않아도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나라이다.'
‘나에게 복지국가란, 누구나 겪는 성숙 위기가 상황위기가 되지 않는 나라, 내가 당장 집 밖으로 나가도 안심하고 갈 수 있는 곳이 있는 나라,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추월하는 것보다 혼자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같이 걷는 게 더 큰 가치로 인정받는 나라이다.’
위의 글들은 민우회 성평등복지팀 트위터(@hifive4w)에서 던진 “나에게 복지국가란?”이란 질문에 대한 답글들이다. 이 답글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지금 쏟아지고 있는 복지 공약들은 어차피 어떤 것은 지켜지고 어떤 것은 지켜지지 않겠지만, 그 공약들을 둘러싼 갑론을박에 참여하고 그 공약들을 기준으로 대표자를 가려내보는 경험 자체가 소중할지도 모르겠다고, 왜냐하면 그 경험은 상상도 안 되는 바로 그 복지국가를 상상해보는 경험이고, 나의 현실을 정책요구로 언어화해 그 상상의 내용을 채워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는 거의 모든 후보들이 복지국가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 복지국가 같은 것이 이 한 번의 선거로 만들어질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번 총선에 관심을 가진다는 건, 4월 11일에 누구에게 투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넘어, 다음 선거와 그 다음 선거로 이어질 내 인생, 그 너른 시간을 내다보며 노후의 삶을 디자인하는 일일 수 있다. 그리고 내 다음 세대의 삶이 나의 현실보다는 덜 각박하기를 바라는 인지상정을 실천해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드디어 본론. 이리하여 민우회 성평등복지팀은 총선을 맞아 ‘성평등복지국가’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해왔고 또 더 하려고 한다. 복지국가가 키워드인 이번 총선을 미래 구상의 장으로 본다면, 우리가 살고 싶은 미래는 당연히 성평등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평등복지국가’가 뭐냐고? 간단히 설명하자면 성인지적 관점으로 설계한 복지국가이고, 길게 설명하자면 밥 벌어 먹고 사는 게 제일 큰일인 이 사회에서 여성들의 일자리만 유독 더 불안정한 이유, 남성들은 그저 가장일 뿐 가족 안에서 점점 감정적으로 무능력해지는 이유, 아이를 기르고 병자를 돌보고 노인과 함께 사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이유, 가족에 대한 신화와 가족의 현실이 동시에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이유에 대한 진단과 대안으로서의 미래상이다.
우선 1월에는 그 상상의 포문을 여는 <2012 성평등복지국가 전략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에는 기존 복지제도에서 여성과 비혼이 배제되는 부분들을 점검한 결과와 성평등과 돌봄의 가치로 한국사회를 재편하기 위한 170여개의 성평등복지 정책과제가 담겨있다. 그 결과 '여성의 노후 소득 보장을 위한 1인 1연금제', '낙태 비범죄화와 의료보험화', ‘남성육아휴직 의무화’, '직장내 성희롱 및 손님에 의한 폭언과 폭행 발생 시 작업장 이탈권 부여' 등 보고서에 실린 정책 중 다수가 각 정당들의 총선 공약에 반영되었다.
3월에는 성평등복지국가 가이드북 <2012 성평등복지국가 가이드라인 : 4W>을 만들었다. 이 가이드북은 고양이가 주인공인 깜찍한 만화책으로, ‘성평등복지국가’가 삶의 어떤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미래상인지를 보여주는 소책자이다.
그 외에도 성평등복지팀 트위터(@hifive4w)에서는 매일 성평등복지 관련 뉴스와 가이드라인이 트윗되고 있고, 11월 대선 전까지 성평등복지제도에 대한 심화 연구사업도 진행할 예정이다.
보고서와 가이드북은 민우회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보고서는 정당이나 정책결정 관계자들에게 요긴할 것이고, 가이드북과 트윗은 당신의 소소한 활용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혹시 트위터를 사용하고 있다면 매일 성평등복지 이슈를 팔로워들에게 전파해보자.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혹은 자신에게 성평등복지국가 가이드북을 선물하고 싶으신 분은 메일로 연락주시라. 우편으로 보내드리겠다. 이렇게 사소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우리 한 번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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