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4월호 [생생한 시각] 한미FTA, 폐기만큼은 날치기로 하지 말자
한미 FTA, 폐기만큼은 날치기로 하지 말자
남희섭 ‧ 변리사
말도 많던 한미 FTA가 결국 발효되었다. 공식 협상을 시작한지 6년만이다. 그러나 협상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은 재협상을 요구하며 유감을 표명했고 ‘한미 FTA 저지범국민운동본부’은 폐기 투쟁을 선언했다. 6년 동안 한국 사회를 달구었던 한미 FTA는 이제 4월 총선의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다른 FTA와 달리 한미 FTA가 유난히 논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신자유주의와 시장근본주의를 가장 철저하게 관철하려는 FTA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한미 FTA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대부분의 쟁점은 신자유주의라는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투자자-국가 분쟁(ISD) 해결 제도이다(ISD를 ‘투자자-국가 소송제’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ISD는 공권적 판단을 구하는 소송이 아니라 사적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중재를 말한다). 외국인 투자자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분쟁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ISD는 그 자체로 국제법의 이단이다. 정부는 ISD가 마치 국제표준이고, 외국인 투자를 보호하기 위해 당연히 필요한 것인냥 홍보하지만, 미국식 FTA에 들어 있는 ISD는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에 기초한 최신 모델이고, 투자자가 투자유치국의 법률을 무시하고 투자이익을 보장받도록 설계된 신자유주의의 집행수단이다. 외국인 투자자는 내국인 투자자와 같이 국내법으로 보호하면 왜 안 된다는 말인가? 외국인 투자자는 왜 사법부의 공적 판단을 받지 않고, 사적으로 구성된 중재인의 판정에 따라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도록 해야 하는가? 사적 분쟁 해결인데 왜 국가는 사안별로 이 해결 방식을 따를지 말지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가? 원래 중재는 양 당사자가 소송 대신 중재절차로 분쟁을 해결하기로 합의를 해야만 가능한데(소송에서는 원고가 피고와 합의를 하지 않아도 소송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미국식 ISD는 ISD 절차에 국가가 자동 동의하도록 했다. 그래서 투자자가 분쟁을 제기하면 국가는 ISD 절차에 무조건 회부되고, 따라서 중재인 3명의 사적 판단에 공공정책의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다. 중재인이 아무리 공정하게 판정을 하더라도, 우리 헌법에 따라 구성된 법관의 공적 판단인 판결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ISD를 긍정하는 순간, 우리 헌법 질서가 미국 투자자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어도 할 말이 없게 된다. 우리 헌법은 중소기업과 농업의 보호를 국가의 의무로 규정하며, 경제민주화를 위해 국가가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이런 헌법 질서는 ISD 앞에서 통하지 않을뿐더러, 한미 FTA의 수많은 조항과도 충돌된다. 한미 FTA는 상품과 서비스 시장을 더 개방하고 투자자에 대한 규제 철폐를 위한 조항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헌법에 따른 국가의 공공정책과 보편적 복지를 구현하려는 정책 공간은 크게 위축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복지와 경제민주화는 한미 FTA와 함께 잡을 수 있는 두 마리 토끼가 아니라,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토끼와 호랑이의 관계다.
내용만큼이나 절차적 정당성을 잃은 것이 한미 FTA다. 미리 해야 하는 공청회를 협상 개시 발표 하루 전에, 그것도 파행으로 진행해 의견 수렴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정부는 이해당사자는 고사하고 국회에도 주요 내용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는 피상적이고 편파적이며, 사실을 왜곡하는 내용이 많아 협정문의 정확한 이해에 별 도움이 안된다. 그리고 협정문의 국어본은 오역 투성이였고, 그 사실을 정부와 국회는 수년이 지나서야 시민사회의 지적을 통해 겨우 알게 되었다. 국민이 부여한 조약심사권을 행사해야 하는 국회는 협정문의 내용에 대한 검증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끝장 토론까지 열었던 상임위원회에서는, 전문적이고 방대한 법률문서인 협정문을 제대로 읽은 국회의원 한 명도 없이 막연한 찬반 입장으로 갈라섰을 뿐이다.
국회 통과 후에도 날치기는 계속 되었다. 협정 발효를 위한 양국의 실무간 협의는 협정 이행을 위한 각자의 국내 절차를 점검하는 과정이다. 우리에게 이것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미국 내에서는 한미 FTA가 아무런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미 FTA를 조약으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의 국내법에서 한미 FTA를 제대로 반영해야만 발효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총선 쟁점화를 피하기 위해 미국 국내법을 제대로 점검하지 않고 서둘러 발효일을 정하려 들었다. 한미 FTA와 같은 시기에 미국 의회를 통과한 콜롬비아, 파마나 FTA의 경우, 이행 점검 과정으로 빨라야 올해 하반기에 발효될 것이라는 전망과 비교하면 한국 정부가 한미 FTA 발효를 위한 준비는 소홀히 한채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비판은 그래서 더 설득력이 있다.
더 큰 문제는 발효일 확정에 있다. 협정문에 따르면 발효일은 양국이 각자 필요한 절차를 “완료하였음”을 통보해야만 정할 수 있다(제24.5조 제1항). 그런데 미국은 미국의 국내 절차를 완료했다는 통보를 하지 않았다. 설사 그러한 내용의 통보를 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국내 절차를 완료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보의 효력이 없다. 실제로 발효일을 정한 서한이 오고가기 바로 전날인 2월 20일 미국 무역대표부의 웬디 커틀러가 외교부의 최석영 대표에게 보낸 서한에는 미국이 필요한 조치를 완료했다고만 하지 않고 앞으로 도입하겠다(will introduce)는 조치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은 협정 발효일 이후에야 일부 행정조치를 취했다. 결국 발효일 확정을 위한 미국의 통보는 절차를 “완료하였음”이라는 현재완료형이 아니라 미래형이었고, 그래서 협정문의 규정에 따른 발효일 확정을 위한 통보를 미국이 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된다(자세한 것은http://krusfta.blogspot.com/2012/02/fta.html 참조).
이처럼 ‘날치기 종결자’인 한미 FTA는 신속하고 간결한 폐기가 보장되어 있다. 어느 당사국이 협정 종료를 희망한다는 서면 통보를 하면 180일 후에 협정이 폐기되도록 협정문에 명시되어 있다. 이런 규정이 들어간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미국이 FTA를 조약으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조약과 달리 FTA는 쉽게 폐기할 수 있기 때문에 행정협정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하고 그래서 미국 내에서의 법적 효력을 부정한다. 물론 이미 발효된(절차적 무효 사유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발효된) FTA를 폐기하려면 우리 내부의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 하지만, 서면 통보 하나로 한미 FTA를 폐기하는 것은 적어도 미국을 상대로는 ‘날치기’가 아니라, 미국이 설계한 바로 그 절차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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