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4월호 [나의 삶 나의 이야기] 나는 어쩌다 여성주의자가 됐을까?
난 어쩌다 여성주의자가 되었을까?
어라 ● 살림의료생협 활동가
처음 기억은 아버지의 외도와 이에 반발한 어머니에게 뒤따르던 갖은 고생을 보면서 아. 이거 뭔가 잘못한 사람이 꼭 책임지는 사회는 아니구나. 싶었던 것 같다. 그 많은 고생들이 “여자는 *** 해야지.” “남자가 @@@할 수 도 있지.”로 시작되는 것을 보며 성별이 사는 데 참 큰 기준이구나 싶었다. 고등학교 때는 얌전한 국어선생님으로 가장하고 있던 한 남자선생님이 나와 몇 명의 왈가닥 패거리를 불러모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피아노’와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를 보여주며 우리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 나중에는 ‘남자가 생리를 한다면’을 읽히고 그 이야기를 연극으로 바꾸어 공연해보자고 우릴 꼬드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머리가 굵어진 딸내미가 “여자라는 이유로 세상이 어머니에게 부조리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요.” 라고 말하자 처음에는 흡족해하셨다.
하지만 TV를 보면서 분통을 터뜨리고 남동생에게 밤을 새며 설교하는 나를 보며 뭔가 점차 불안해지셨다고 한다.
난 이상한 여성주의자였을까.
대학에 진학하니 신세계였다. 내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것이 확실히 잘못되었으며,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잘못된 것도 잔뜩 있고, 왜 문제인지 쏙쏙 설명을 해주는 여러 이론과 운동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회에 학회에 여성주의 모임까지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거란 자신감보다는 몰라서는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이 있었다. 학생운동이나 여성운동에 최대한 참여하는 것이 내가 생각한 ‘아는 과정’이었다. 학년이 올라가자 ‘선배’가 되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 데 여러 가지 활용 가능한 도구들도 다양해졌다. 공격적인 말투와 강한 눈빛으로 내 의견을 피력하여 압박하고, 격한 논쟁이 끝난 후에는 같이 담배를 나눠 피는 인간적인 모습. 반성폭력 자치 규약에 죽도록 반대하는 복학생 선배들을 하나씩 따로 만나 술마시며 친해진 뒤 찬성 몰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여성주의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인간 어라'와는 너무나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도 다른 여성주의자와 똑같은 말을 하는 건데, 반응이 다르게 나오는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이게 잘하고 있는 건지, 이상하게 가고 있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길거리에서 시비 붙는 아저씨들과의 싸움은 갈수록 격해졌고, 싸우고 나면 금세 잊어버렸다. 같이 있었던 여성주의자 친구들은 파이트백 사례라며 속시원해하기도 했지만, 내가 자기의 적이 아니라 다행이라며, 싸웠던 아저씨보다 내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고 살며시 말하기도 했다.
그 길을 계속 걷다보니.
졸업 후 여성주의 단체인 ‘언니네트워크’ 일을 하다 보니 여성주의자가 아닌 사람을 만날 일이 드물어졌다.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지내게 되니 격렬한 분노나 논쟁의 한 쪽 모습은 사라지고 인간적으로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이 남은 것이다. 이런 상황은 묘하게도 내가 사람과 관계 맺는 방식을 오롯이 드러나게 했다. 나의 관계 맺는 방식을 알게 되면서 마주한 나의 여성주의는 너무 단순하고 거친 것 같았다. 수많은 갈등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혹은 못하기도 하지만) 그냥 스쳐 흐르곤 해서 누구와도 사이좋게 지내는 장점도 있었다. 그래도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과 있을 때, ‘예리하지 못하고 무딘 여성주의자인 것이 아닐까, 그저 사람을 좋아해서 활동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늘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내가 생각하는 여성주의를 최선을 다해 표현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공자님 왈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모두 잘 지내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시니 말이다.
내 스타일~ 여성주의로 주민운동 하기.
어쨌든 나는 여성주의자로 100살까지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건강이 필수였다. 나의 필요를 직접 만들자니 혼자는 힘들고, 함께 참여하고 책임지는 협동조합이 알맞았다. 건강을 화두로 하는 의료생활협동조합의 경우 근거리 일차의료, 예방의료 중심이라 지역 주민과 함께하지 않고는 만들 수 없었다. 마을이 여성주의적으로 건강하지 않고서는 나도 건강할 수 없으니까. 이제 내가 가진 여성주의 감수성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강에 대한 신념을 동네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할 기회가 온 것이다.
동네에서 주민들이랑 같이 여성주의 건강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같이 보낸 시간이 3년. 왕년 스트리트 파이터의 격정이 다독여지는 몇 년을 보내고 남은 허허실실한 모습을 어쩌나 싶었는데, 얼마 전 살림의료생협이 창립총회를 열었다. 앞으로도 갈 길이 구만리지만 울고 웃던 지난 시간을 잠시 돌아보면 내내 마뜩치 않게 여겼던 내 활동 스타일이 좋은 쓰임이 있는 곳을 찾은 것 같다. 동네에서 만난 사람들은 처음에는 여성주의를 낯설어 하기도 하지만, 사실 말을 더 나누고, 부대끼다 보면 수많은 접점을 발견하고 함께 감동하는 순간들이 꼭 있다. 긴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사람과 여성주의를 믿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것, 조금 무디고 느리지만 내 여성주의가 실천되는 방식은 이런 건가보다.
“우리 동네에 여성주의자들이 많이 와서 동네가 진짜 살기 좋아졌다.”, “은평에 살림의료생협이 있어서 자랑스럽다.”는 말을 동네 사람들에게 들으면 정말 행복해진다. 그래. 여성주의는 참 모두에게 좋은 거고 사랑받아 마땅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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