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6월호 [나의 삶 나의 이야기] 페미니스트 수달, 담양댁의 느린 하루
▣나의 삶 나의 이야기
페미니스트 수달, 담양댁의 느린 하루
페달 ‧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눈을 뜨다.
아침잠이 많은 애인은 창호지에 햇살이 가득한데도 잠에 빠져있다. 문밖에서 시끌시끌 민박 손님들이 화장실 가는 발소리에 나도 정신이 번쩍 든다.
귀촌한지 석 달 남짓, 나는 지금 빈도림 생활공방에 있다. 새들도 느릿느릿 날아다니는 이곳은 창평 슬로시티다. 시간이 멈춘 듯 한 돌담길과 곳곳에 배여있는 마을 주민들의 흔적을 보러 도시사람들은 이곳을 찾는다.
아침일과는 어젯밤 이 집에서 묵은 사람들을 위해 따스한 아침 밥상을 차려주는 것이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골마을에는 생협이 없다. 대신 싱그러운 텃밭과 아침마다 알을 낳는 닭들의 울음소리가 힘차다. 아직 자급 할 것이 없는 나로서는 택배로 물품을 받아먹을 수 밖에 없다. 곧 자급자족을 이룰 나를 상상하며 전날 불려놓은 현미쌀에 물을 붓고 죽을 끓인다. 인심 좋은 옆집 어머님이 한 솥 가져다주신 갓김치와 배추김치로 상을 차린다. 애인은 어느 틈에 일어나 마당도 쓸고 반찬도 부지런히 나르며 남은 잔설거지를 한다. 얼마 전부터 싹이 트기 시작하더니 무서운 속도로 커가는 상추를 따다 샐러드도 만든다. 이 집에 머무는 손님들은 모두 한 공간에서 아침을 먹는다. 서먹한 밤이 지나고 아침오면 모두가 이웃이 된다. 고개를 돌리면 90년을 피고 진 연산홍이 화려하게 아침빛을 뽐낸다.
봄, 햇살에 마음이 익어간다.
아침을 조금 분주히 보내고 나면 느린 삶으로의 초대가 시작된다. 전날 장에 나가 사다놓은 모종들을 둘러보고, 한뼘 텃밭에 골고루 나눠 심는다. 서울서 내려올 때 가방에 넣어온 마늘에 싹이 터 옮겨심었더니 제법 길게 자라고 있다. 날설은 시골 땅인데도 용케 자라는 걸 보며 나도 기운을 얻는다. 툇마루에 앉아 애인과 숨을 고른다. 호미질로 뻐근한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구름 지나는 소리도 듣는다. 생활공방이 있는 방안으로 들어가면 자연이 선물해준 물건들이 주욱 전시되어있다.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만드는 이 곳에 가득 찬 밀랍으로 만든 꿀초, 야생차, 손으로 만든 면생리대, 컵 주머니, 천연화장품들은 언제봐도 기분 좋다. 이 공간에서는 모두가 시간의 주인이 된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누구 하나 재촉하는 이 없고, 조금 서툴지만 제 손으로 함을 미덕으로 여긴다. 애인은 한지를 펼치고 먹으로 명함을 써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공장에서 찍어낸 반듯함은 없지만 그 안에는 정성이 담긴다. 서울에선 발견 할 수 없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뒤늦게 알게 돼 밤낮으로 그림공부다. ‘강정은 꽃이다, 강정에 평화를 바랍니다.’라는 글과 함께 그림을 그려 공방 부엌에 걸어놓았더니 오고가는 사람들마다 강정의 평화를 이야기 한다. 이만큼 편한 운동도 없지 싶다.
꿀초를 만들고 싶어 하는 가족이 찾아와 선생님들을 도와 체험준비를 한다. 밀랍을 녹이고 심지를 담금질해 한 자루의 초를 완성한다. 꿀초는 밀랍외에도 시간과 정성이 재료로 들어간다. 채 굳지도 않은 심지를 재촉해 담그다 보면 결국 밀랍이 녹아버려 심지만 남는다. 밀랍통에 심지를 담갔다 뺀 후 소나무 주위를 돌기도 하고, 하늘 한 번, 나무 위 새 한 번 쳐다보며 천천히 다시 담그는 작업을 해서 밀랍을 겹겹이 입혀 초를 만든다. 개구쟁이 꼬마 아이들도 꿀초 앞에선 모두 얌전한 동자승이 된다.
오후의 햇살이 그윽해지면 공방문을 닫고 마을 산책길에 오른다. 마을 곳곳에는 <수의 바느질 교실> <야생화 교실> <약초밥상 교실>등의 간판이 붙어있다. 삶의 모든 경험을 존중하는 마을 분위기 속에서 40년 동안 바느질을 해 오신 수의 바느질 할머니도, 야생화 사진을 찍다가 효소를 담게 되신 야생화 어머니도, 남성들만 가능 하다고 여기는 화덕교육을 받아 장인이 된 어머니도 모두가 주민 교사다. 여성들의 지혜와 삶이 여지없이 발휘되는 공간이다. 저녁엔 일주일 세 번 애인과 요가를 배우러 다닌다. 그 외의
저녁 시간에는 텔레비전도 없는 방안에서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는다. 출퇴근 거리가 한 시간씩 걸리던 때는 맛볼 수 없는 낭만이다.
불을 끄고 별을 켜면 세상이 고요하다.
이따금씩 개구리가 목청을 돋우고, 텃밭에 심겨진 토마토며 상추, 고추들이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 시골 방안은 창호지 문 사이로 서늘한 솔솔 바람이 들어와 콧등이 간간히 시렵다. 느리지만 제 속도에 맞게 살아가는 이 공간은 꿈이라기 보단 현실에 가깝다. 다만 그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만 열려있을 것이다. 내일은 텃밭에 퇴비를 좀 주고, 창호지를 좀 더 사다 발라야지 계획을 세우며 까무룩 잠이 든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