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der board list icon](/assets/common/header-board-list-icon-871ea5b4968af0aff7ac9000984dc947.png)
2012년 5*6월호 [마포나루에서] 나의 '방'을 생각하다
▣ 마포나루에서
나의 ‘방’을 생각하다
원진(눈사람) ●여성노동팀
나의 여덟 번째 방. 드디어 그 현관 앞에 섰다. 완강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그 철문 한복판에 도어뷰의 렌즈가 보였다.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고안된 것이지만, 그 렌즈에 눈을 가져다 대면 무엇인가 보일 것 같았다. 여덟 번째 방 속에 나의 일곱 번째 방이 있고, 그 속에 다시 여섯 번째 방이, 다시 그 속에 다섯 번째 방이, 그렇게 첩첩이 들어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방들을 역순으로 되짚어 올라가다보면 마침내 스무 살 시절의 나 자신과 조우할 수도 있으리라. 그때가 그리운 것인지 어떤 것인지 지금의 내 심정을 잘은 모르겠으나, 그때의 나를 만나면 할 말이 무척 많을 것 같기는 하다. 일단은 안부부터 물어야겠지만.
- 김미월의 ‘여덟 번째 방 중에서
갑자기 스무 살의 나에게 안부를 묻고 싶어졌다.
잘 지냈니? 잘 지내?
내가 살았던 방을 역순으로 되짚어 가다보면, 나의 스무 살을 만날 수 있다. 20대의 기억 안에 방이 있는 게 아니라, 방 안에 20대의 기억이 있다. 집을 나오는 것만이 사실상 유일한 꿈이었던 10대 시절. 앞자리가 바뀌면 반드시 집을 나가리라. 여기를 벗어나리라. 스무 살이 되면, 스무 살에는, 스무 살, 스무 살, 스무 살. 늘 말끝마다 그 놈의 스무 살을 달고 살았다. 그러자 최면효과처럼 스무 살이 되면 세상이 개벽이라도 할 것처럼 느껴졌다. 개벽은 개뿔.
집에서 나와 산지 횟수로 10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보다도 빨리 변하는 게 바로 ‘거처’였다. 스무 살부터 스물아홉 현재까지 (집이 아니라) ‘방’이 다섯 번 바뀌었다. 2년마다 한번 씩 이사를 다닌 셈이다. 처음 방은 반 지하, 다음 방도 반 지하. 그 다음 방은 화장실 없는 다세대 2층, 다음은 옥탑. 현재는 서울의 집값을 감당할 수 없어서, 경기도의 조그만 아파트.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위치도 수시로 바뀌었다. 대학생, 휴학생, 알바생, 영화스텝, 작가 시다바리, 그리고 활동가까지. 이렇게 열거하고 보니 나 참 정신없이 살았구나, 싶다.
반지하와 옥탑처럼 나의 20대는 오르락 내리락 했다. 반지하 방의 여름은 비가 새고 곰팡이가 폈고, 옥탑방의 겨울은 유달리 추웠다. 나는 영영 봄이 오지 않을 것처럼 주어 없는 욕을 했다.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웠고, 기침을 달고 살다가, 결국 페렴과 결핵이 겹쳐서 입원까지 했다. 시급은 제자린데 월세는 계속 오르고, 아르바이트 인생에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 달이 얼마나 짧은지 월세를 내면서 알게 되었다. 월세를 내고 시급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간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달라졌다. 스무 살을 전후로 바뀐 건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오랜만에 예전 일기장을 들춰보았다.
04.6.12 한 마리의 새가 되고 싶다. 그럼 굳이 뿌리내리려 애쓰지 않아도 좋을 테니.
05.6.4 눈을 감았다 뜨면 서른, 혹은 스물. 퇴화하거나 추락하거나.06.9.28 이념도 신념도 가치관도 모두 사라진 문명의 폐허 속에서 나는 살아가고 있다.
07.3.22 희망을 버려 그리고 밥을 먹어.
08.2.2 청춘이 뽁뽁이처럼 터진다. 개도 안 받을 청춘.
하하 개도 안 받을 청춘이라니.
개도 안 받을 청춘에게 한번 더 물어보자.
“잘지냈니? 잘지내?”
답은 영화 레옹에 나오는 대화로 대신하겠다.
“사는 게 항상 이렇게 힘든가요? 아니면 어릴 때만 그래요?”
“언제나 힘들지”
다시 일기를 쓴다. 30대에 읽혀질 일기를.
그리고 다음에는 질문 대신 “잘 지내지 못해도 괜찮아” 라고 말해주자.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