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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6월호 [人터뷰] 두리반은 우리였다
▣人터뷰
두리반은 우리였다
- 두리반 식당 안종녀 사장을 만나다
어느 날 부터인가 트위터나 신문에서 ‘두리반’ 이름이 자주 보였다.
인디밴드 누가 공연을 한다. 누구는 칼국수를 먹으러 간다.
홍대 지하철역 부근에 평범한 칼국수 집이 유명해진 건, 재개발 때문이었다.
가게 보증금과 시설비에 비하면 턱없는 돈 300만 원을 주고 나가라고 했다.
어디에서도 다시 칼국수 집을 할수 없기에 떠날 수 없었다.
하지만 집기들은 들려나가고, 주인 부부는 쫓겨났다.
철거되기 직전에 가게에 들어가 소설가 남편은 글을 썼다.
아내는 전국철거민연합회의 회원이 돼서 철거 현장에 함께 싸우며
두리반을 지켜나갔다.
2년 후, 두리반 식당은 새로운 장소에서 다시 시작한다.
주위에선 용산참사와 같은 일이 생길까 봐 걱정 했었다.
하지만 축제처럼 다양한 사건과 사람들이 함께한 이 싸움의 끝은 승리였다.
Q가게가 아기자기하고 예뻐요. 가게 곳곳에 그림이며 쪽지들이 많이 보이네요
벽에 걸린 그림은 대중이라는 만화가가 그려준거에요. 우리가 농성 막 시작할 때, 사람들이 돈(권리금) 더 받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 그랬어요. 그때 남편이 ‘아내의 우물’이란 글을 써서 한겨레에 연재를 했어요. 대한민국은 우물이라고
물 한 바가지 주면 말라 죽을 거 아니냐 300만원 주고 나가라고 하니까 글 연재하고 나서는 그런 댓글이 없었어요. 농성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글로 썼는데 호응을 많이 해주셨죠. 그 글을 읽고 대중이란 만화가가 그려준 그림이에요.
Q두리반 식당에선 홍대 인디 밴드들의 공연이 많았어요. 그 외에도 다양한 기획들이 많았는데요. 기억에 남는 공연 있으세요?
농성을 하는 상태에선 어떤 게 좋았다 느낄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요. 공연을 하면 지하철 공사로 가게 지반이 많이 낮아져있으니까 사람들이 뛰어서 무너질까 걱정이고. 처음엔 인디밴드 음악도 낯설어서 괴롭고(웃음) 내가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안돼는 거에요.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엄보컬‧김선수(2인조 밴드) 공연이였어요. 용산참사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두리반에 찾아와 공연을 해줬어요. 그 후로 매주 월요일 마다 공연을 했어요. 그게 가장 인상 깊고 고맙죠. 그들이 공연을 할수 있는 공간으로 시초를 만들어줬거든요.
Q작은 용산으로 불리기 전에 두리반 식당은 어떤 곳이었나요?
남편이 글쓰는 사람이니까 직장생활 할 때 말곤 고정 수입이 없잖아요. 그래서 시작했지만, 내가 가게를 할수 있는 게 행복했죠. 먹고 사는 의미도 있지만 내가 일할 수 있는 일터였어요. 먹고 살기 위한 노동 그 이상의 것이었어요.
Q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평화로운 일상이 사라지게 된 거네요.
그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보증금 내서 계약하고, 합법적으로 월세 내고 세금 내면서 장사를 했는데. 내가 계약한 계약기간 동안은 보장 받은 기간이잖아요. 근데 그렇게 합법적으로 끌려나갈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했어요. 그때 자존감이 다 무너졌어요. 그게 회복이 안돼더라구요. 내가 이 나라에서 쓰레기처럼 폐기처분 될 수 있는 사람이구나, 무가치하구나. 그게 굉장한 큰 상처였어요. 나보다 더 심하게 당한 사람들도 많은데. 이 정도로 우울하고 힘들면 안돼지 하면서도 나름대로 트라우마가 있더라구요
Q철거라는 게 단순히 가게나 집이 없어지는 것 이상인 거 같아요.
처음에 남편은 농성 하지 말자고 했어요. 어떻게 해서라도 가게 다시 할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렸어요. 철거민이라는 게 부끄럽고 싫었대요. 근데 그때 당시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극단적인 생각 뿐이었어요. 나 하나 죽는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거 아니지만 내가 견딜 수가 없으니 거기서 죽든 농성을 하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가게를 지켜준거죠. 철거되기 전날 새벽에 들어가서 그들 말로는 점거농성이 시작된거죠. 저는 전철연 회원(전국철거민연합) 이라서 집회를 가면 가게를 비우게 되니까 남편이 지켜줬죠.
Q두 분이 함께 농성을 하셨지만, 처음엔 의견이 다르셨네요. 농성 동안 싸우진 않으셨어요?
끝까지 많이 싸웠죠. 둘이 잘 싸운다고 소문 났어요. (웃음) 인터뷰 하다가도 싸우는 거에요. 인터뷰하러 온 피디들이 나중에 그러더라구요. 인터뷰는 좋았는데, 싸우다가 누구 말이 맞냐고 물으면 무척 곤란했다구요. (웃음) 잘 헤나가기 위한 싸움이지만 의견이 안 맞는 거에요. 근데 맞출 수가 없어요. 맞추게 된다면 그건 한 사람의 의견에 휩쓸려 가는거지, 내 주장은 없어져 버리는 거니까. 그래서 우리는 팽팽하게 같이 갔는데, 끝나고 나서 주변 사람들이 굉장히 조화로왔다 얘기를 해요.
Q보통은 급박한 상황에서는 타협을 하거나 싸움은 피하게 돼는데. 그 와중에도 팽팽하게 가셨다는 게 재밌네요. ^^
굉장히 싸웠죠. 거기다 전 조직에(전철연) 있잖아요.(웃음) 조직의 싸움 방식을 어느 정도는 따라줘야 하거든요. 근데 우리가 하는 건 전혀 다르잖아요. 강한 발언들을 구호로 외치고, 현수막으로도 만들고요. 근데 남편은 안된다, 그럼 일반 사람들이 올수가 없다고 반대를 한거죠. 결과적으론 남편이 하는 방법이 맞더라구요. 전철연이 와서 집회하고 상주하는 게 아니잖아요. 보통 사람들이 나이든 사람들부터 청소년들까지 정말 다양하게 찾아오는데. 한 가지 색을 갖고 가는 게 좋지 않겠더라구요. 그래서 남편 말을 따라줬죠. 지금은 전철연에서도 굉장히 외롭지 않은 싸움이었다고 말해요. 잘못된 사회, 잘못된 개발법을 그들과 함께 얘기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고 받아들이더라구요.
Q힘든 시간을 버텨내시고, 결국엔 ‘두리반 식당’을 되찾으셨어요. 그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그건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다른 철거 투쟁에 비해) 빨리 잘된 게 다른 군더더기가 없었거든요. 그동안 영업 못한 피해라던지, 정신적 피해라던지. 이걸 다 내놓으라고 할 때 길어지고 힘들거든요. 그래서 우리 다 필요없다. 오로지 가게만 돌려달라고 했죠. 또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다보니 강제 철거도 할수 없으니까 결국엔 합의를 하자고 하더라구요. 합의 과정은 반상회를 해서 다 공개를 했어요.
Q반상회를 하고 과정을 모두 공유한다는 게 인상적이네요.
두리반에 함께하는 사람들이 정말 들쭉날쭉 하고 많았지만 모두 ‘내 일’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럴만한 권한을 공유했죠. 농성 하는 동안 밥을 차려서 대접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뭐든 같이 하는 거에요. 저는 그게 상식이라고 생각해요. 다 해서 대접하면 손님이지 주체가 될수 없잖아요. 나중엔 스스로도 당당해질 수 있는거죠. 같이 했던 얘들을 많이 울리기도 하고, 싫은 소리도 했어요. 나중엔 제 뒷담화 하는 모임을 만들어서 친해지더라구요(웃음) 지금은 그 친구들이 제가 제일 좋대요. 지금도 자주 오구요. 같이 지낸 시간들이 쌓이는 거죠.
Q위기를 지혜롭게 헤쳐나오셨어요. 그래도 제일 힘들었던 게 있으셨다면?
늘 불안과 긴장이 힘들었어요. 농성 끝나고 제일 좋은 건 긴장감이 없는거에요. 밖에서 이상한 차가 보이거나, 용역이 올까봐 계속 불안 한거에요. 차라리 가게로 들어오면 괜찮은데, 들어오기 전에 공포가 굉장히 컸어요. 그래서 분노를 늘 갖고 있어야 해요. 싸움이 길어지다보면 헤이해지고, 약화되면 분노를 놓치게 되는 거에요. 그럼 그 자리에 두려움, 공포가 들어차는 거에요. 그러니까 매 순간 분노를 갖고 있어야 해요. 분노를 늘 갖고 있다는 게 참 힘들더라구요.
Q그렇게 힘들게 다시 찾은 가게! 매상은 어떠세요? ^^
예전 가게보단 장사가 잘돼요. 그렇지만 월세도 비싸고, 공과금도 많이 내다보니 비슷한 거 같아요. 안타까운 건 예전 자리에 있었으면 월세가 싸니까 음식값이 더 오르지 않을 수도 있을텐데. 건설사들이 건물을 사면 엄청 비싸게 세를 놓고, 비싼 월세 때문에 음식값도 오르게 되죠. 건설사가 개발하면서 버는 돈은 소비자가 물어야 하는 거잖아요. 결국, 우리들이 지불을 하는건데 일반 사람들은 의식을 못하더라구요. 가게 뿐만 아니라, 주거도 마찬가지에요. 낡은 집들이 없어지면 젊은 사람들이나 힘든 사람들은 무슨 재주로 집을 얻겠어요. 싸게 얻으면 언제 쫓겨날지 모르고. 결국엔 다 우리들의 일인거죠.
Q철거 이후에 많은 일들을 겪으셨어요. 삶의 가치관이 많이 바뀌셨을 거 같아요.
변화가 많이 오죠. 가게를 찾는 게 완전한 승리라고 생각했어요. 철거를 겪고 나면 트라우마 때문에 새로 가게를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저희는 상징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어서 운영을 하고 살아가기로 했죠.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하고 있지만 굉장히 힘들죠.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들을 보면 ‘그들이 나고, 내가 그들이다’ 라는 생각이 확 박히게 되죠.
평범하고 행복하고 살았는데 그렇게 당하고 나니까 세상이 너무나 거대하고 잘못 된 게 보이는 거에요. 하다못해 강이든 산이든 파헤쳐지는 게 아픔으로 오는 거죠. 세상을 느닷없이바꿀 순 없으니까 마음을 느긋하게 먹어야 하는데 그게 안돼죠. 그러니까 우리가 농성해서 많은 사람들 덕분에 잘된 것처럼. 이렇게 모두 모여서 좋게 바뀌어지면 좋겠어요.
두리반 식당은 앞으로도 열려 있다. 문을 닫는 일요일엔 녹음실로 빌려주기도 하고,
바자회 장소로 빌려준다고 한다. 그래서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마음에 평화를 빕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고, 내가 당신이라는 것도 잊지 마세요.
또 다른 두리반에서도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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