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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6월호 [기획] 여름날의 커리어 우먼 코스프레
▣기획
여름날의 커리어 우먼 코스프레
쿠나 ․ 한국여성민우회 회원
후덥지근한 여름밤이었다.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향하는데 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길 한쪽으로 옮겨 걷고있는데, 차가 좀 더 바짝 다가오는 느낌이 들어 걸음을 멈췄다. 더 비켜설 곳이 없는데, “주차라도 하려는 걸까?” 싶어 뒤돌아 본 순간 바로 옆까지 정지해 있었다. 날은 어두워져 얼굴도 보이지 않는 운전자는 “어디까지 가요? 태워줄께요” 라고 말했다. 옆에는 차가 바짝 붙어있고, 반대쪽은 벽이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에 태워준다는 말은 제안이 아니라 협박같이 느껴져서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 사람은 한 번 더 물어왔다. “어디 살아요? 태워다 줄께요.”
모기만한 목소리로 싫다고 두 번인가 얘기 했더니 운전사는 그제야 알겠다고 하며 사라져 갔다.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집이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점심, 가깝게 지내는 직장 내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자
"어쩐지 어제 치마가 너무 짧더라."
라는 대꾸가 돌아왔다. 황망한 표정을 수습할 새도 없이 이어 날아온 말은 "이제 그런 어두운 길로는 다니지 마. 거기 술집 많잖아."
짦은 순간의 공포에 대한 공감과 위로가 필요했는데 왠 걸, 무신경하게 짧은 치마를 입고 밤길을 혼자 돌아다닌 여성이 되어 꾸중을 들었다. 이 자체만으로도 충격을 받았지만, 동시에 직장 내에서의 '평판'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거라는 느낌에 더욱 어지러웠다. 그 후엔 당시 직장 상사가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자유분방'한 내 옷차림을 못마땅해 한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들었다. 그 후론, 마지못해 패션의 이중생활을 시작했다. 취향과는 전혀 무관하게, 적당히 단정하면서도 여성스러운 옷들을 계절별로 몇 가지 구비해서 직장인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다. 코스프레를 하고 부터는, 꾸중을 들을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업무상 만나는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때 '도대체 당신은 여기서 뭐하는 사람이요?' 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다. 위 아래로 흝어보는 시선도 사라졌다. 그 위에 겉옷을 하나 걸쳤으면 좋겠다는 상사의 '조언'도 듣지 않게 되었다. 살을 조금 덜 드러내고 약간의 소매가 달린 윗옷을 입은 것 뿐인데. 달라진 것은 전혀 없는데, 어엿하고 성숙한 회사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더 심각한 상황은 옷 외에도 갖추어야 하는 항목이 열 손가락으로도 부족하다는 것. 직장에서 비난받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여름을 보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검열하고 판단하고 손질 해야 한다.
둔하거나 나이들어 보이지 않기 위해 살이 쪄서는 안된다.
다리와 겨드랑이에 털은 깔끔하게 제거되어야만 한다.
맨 발톱이 드러나는 것은 지저분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은 손질을 하고 페디큐어를 해주어야 한다.
발이 드러나는 신발을 신을 때에는 발 뒤꿈치도 매끈해야 한다.
땀냄새가 나지 않기 위해 데오드란트를 사용해야 한다.
등등.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매일 출근하기 전, 바쁜 와중에도 발끝부터 머리 끝까지 자동적으로 점검하게 된다. 거울 앞에 서서 바라본다. 자, 오늘도 (회사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인가. 심심한 누군가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옷차림인가.
그러나 24시간 중 직장에서의 8시간 외에 시간들은 어떻게 지내나? 출근길 지하철은 아무리 냉방을 가동해도 무수한 사람들의 열기로 끈적이기 마련이다. 소위 '커리어 우먼'용의 옷에는 날씨에 대한 배려란 눈꼽만큼도 없는 듯 하다. 속옷이나 다리가 비치지 않아야 하므로 아무리 시원한 소재라도 비치지 않게 속옷 받쳐 입어야 한다. 땀이 나는 몸에 척척 감기는 옷들의 감촉. 게다가 브래지어도 신경쓰지 않으면 끈이 보인다던가 색이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들을 수도 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보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여름용이라고 나온 신발의 엄지발가락이나 측면이 뚫린 정도로는 통풍은 어림도 없다. 퇴근 후에는 공연을 보러 갈수도 있고 한강으로 산책을 하러 갈수도 있다. 이때야말로 더욱 직장인 코스프레는 활동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공연이나 모임에라도 정숙한 차림은 재미없고 따분하다. 바닥에 앉을 수도 없고 꽉 조이는 소매가 터질까봐 몸을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소리지르고, 뛰고,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지해 있다. 최대한 옷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꼼지락 거릴 뿐.
여름을 사랑한다. 뜨겁고 강렬한 햇빛. 입고 싶은 만큼만 입고 훨훨 다니고 싶은 계절이다. 그리고 노출은 이런 마음에 자연스러운 표현방식이다. 직장에서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를 입으라던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으라던가, 소매없는 옷을 입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훨씬 더 무섭게 내 목을 옥죄고 땀구멍을 막고 있는 것들이 최소 수 겹은 되는 듯 하다. 계절에 맞게 입으면서 ‘그들’이 볼 때 아름답게 노출하는 여름이 벌써 여러 해 지나고 있다. 상식적인 직장인으로 보여지기를 요구하는 일터, 그런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시선들, 그리고 그 속에서 인정받고 살아남고 싶어하는 욕구.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스스로의 표현 방식을 점검하는 나.
이 연결고리들을 끊어내지 않는 이상, 진정한 여름의 자유로움은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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