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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6월호 [기획] 노출, 노출, 노출
▣ 기획
노출, 노출, 노출!
알라 ․ 출판인
여름이 되면 많은 여성들이 고민에 빠집니다. 한번 시원하게 지내보겠다고 용기 내어 입은 짧은 반바지, 민소매 티셔츠들은 어느새 사회적으론 “그렇게 입으면 성범죄의 대상이 된다”는 어이없는 문구들로 정리되어 버리고, 분명 내가 선택하고 입은 옷인데,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 야하게 입는 거 아냐?”라며 나의 행위주체성은 사라져 버린 채, 대상화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시선들을 거부하겠다고 결심하고, 겨드랑이 털도 깎지 않은 채 길거리를 활보하고 있으면, 바로 뒷날 인터넷 뉴스 1면에 “겨털녀!”란 제목으로 등장하겠죠. 이렇듯 여성의 노출이라는 문제는 결코 단순히 이만큼 입고 드러내겠다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타인의 시선, 통제, 내면화된 훈육 같은 보다 복잡한 문제들이 엮여 있는 듯합니다. 이런 문제들이 얽혀 있는 가운데, 여성의 노출 문제를 남성의 권력적 시선/여성의 성적 대상화로 이분화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런 이분화는 여성을 피해자라는 프레임에 가두어 버릴 수도 있고, 자기 몸에 긍정적인 여성들을 배제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 좀더 노출을 다르게 볼 순 없을까요?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너나 할 것 없이 노출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섹시하다는 게 여성의 외모에 대한 가장 큰 칭찬이 되는 이곳에서, 노출을 금지하는 게 여성주의적인 방향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쩌면 몸을 아름답게 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노출을 부정하고, 더 이상 아름답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남성적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일지도 모릅니다. 이미 이런 시도는 1968년 미국에서부터 있어 왔습니다. 포르노그래피에 대해 반대해 왔던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 언니도 자신의 몸과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적 규정에 반대해 왔습니다.
물론 이런 사례들이 시사하는 바는 무척 큽니다만, 노출에 반대하고, 외모에 무관심해지는 것이 정말 여성주의적인 태도라 할 수 있을까요? 그 와중에도 아름답게 보이고 싶고, 노출이나 화장, 아름다운 옷들을 통해 자신의 여성성을 드러내고 싶은 수많은 여성들은 그렇다면 여전히 가부장제의 덫에 갇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사람들일까요? 아마 그건 결코 아닐 겁니다. 가부장제가 노출하는 여성들을 대상화한다고 해서, 노출하지 않는 여성들을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고, 적극적으로 노출하는 여성들을 “백치미”라며 비하함과 동시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않는 여성들은 아예 가부장제에서 배제되거나 외모로 인해 엄청난 차별을 받을 수 있게 되니까요. 문제는 여성의 노출이나 미모가 아닙니다. 여성의 노출을 바라보는 권력자의 위치에 있는 남성의 시선이 문제인 것이지요. 2012년 현재 제가 68년의 미국 언니들의 운동을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렇습니다. 노출로 인해 대상화된 몸을 거부하는 언니들의 문제 제기는 백번 공감하지만, 과연 성별을 없애 버리고, 여성들이 갖는 섹슈얼리티를 삭제해 버리는 방식이 과연 대안이었을까요? 이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앞서 80년대 들어 노출을 과감히 즐기면서 여성들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했던 마돈나(Madonna) 언니를 한 번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콘브라, 채찍, 보정 속옷 같은 코르셋을 입고 80년대 팝계의 수퍼스타로 떠올랐던 마돈나 언니. 자신의 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여성들의 성적 욕망을 가감없이 미디어에 보여 주었을 때, 언니의 등장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습니다. 그녀는 생각지 못했던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맘껏 과시하고, 노출함으로써 남성의 권력적 시선에 저항했습니다. 또한 트로피 와이프라는 용어가 증명하듯, 성적 매력이 넘치는 여성들이 남성 욕망의 대상이 된다면 남성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성의 몸과 외모는 곧 권력이 될 것입니다. 이때 주-객의 전도가 일어납니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욕망할 만한 대상이 되기 위해 남성들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전 재산을 다 갖다 바칠 것이며, 그녀는 아름다운 몸과 외모를 통해 남성을 지배하게 되겠죠. 마돈나가 남성-여성 모두에게 매력적으로 비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돈나와 같은 노출이 우리의 전략이 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마돈나는 은연중에 가부장적 권력관계에 어떤 균열도 내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마돈나가 아닌 평범한 여성들은 과연 마돈나가 누렸던 권력을 누릴 수 있을까요? 노출할 만큼 아름답지 않은 몸을 가진 여성들은 더더욱 배제되지 않을까요? 그녀는 남성적 시선-여성의 대상화에 주-객 전도를 어느 정도 일으킨 것은 맞지만, 정확히 그만큼 다시 여성을 대상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저는) 봅니다.
벗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고, 옷 하나 고르려고 해도 이것저것 따져야 하는 신세라니요. 어떻게 하라는 건지, 저도 명확히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만, 이번엔 베스 디토(Beth Ditto)를 만나보는 걸로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아시다시피 베스 디토는 정말 그!로!테!스!크!라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몸을 가진 가수입니다. 마돈나처럼 운동과 식이로 다져진 멋진 몸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녀는 타인의 시선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몸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베스 디토는 겨드랑이 털도 깎지 않은 채 무대를 활보합니다. 덕분에 그녀는 노래보다 몸이 갖는 기괴함으로 먼저 명성을 떨쳤죠. 가부장적 판타지와 거리가 먼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에 숱한 균열을 만들며, 성별이 갖는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죠.
저는 베스 디토가 만들어 내는 이 균열이 어쩌면 우리에게 노출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제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끊임없이 규범에서 이탈하는 여성의 몸, 여성의 노출, 남성적 기준에서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계속 만들어 내고, 균열을 가하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노출이 갖는 양가성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베스 디토처럼 가부장적 질서에서 이탈하면서 만들어 내는 이미지와 노출이 남성 권력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드러나고 움직이게 하는 것, 이런 것들이 남성적 미에 갇힌 여성들을 해방시킬 수 있진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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