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8월호 [기획] 과거에서 미래로 - snapshot
▣기획
과거에서 미래로 - snapshot
조윤 ‧ 언니네 ‘어떤 사진관’
박영숙 작가를 만나보지 않겠냐고 받았을 때, 사실 많이 망설였다. 박영숙 작가는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진행된 “미친년 프로젝트”로 유명한 1세대 페미니스트 사진작가이다. (현재는 종로구 소격동에 있는 트렁크 갤러리를 운영한다) 그에 반해 나는 아직 사회에서도 풋내기 20대이고, 사진을 찍은 역사도 짧은 편이다. 이런 내가 이미 깊은 연륜과 역사를 지닌 사람과의 만남이 가능할지에 대한 의구심이 더 앞섰던 것이다. 그분과 만나면 이야기가 통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고민이 많은 시기를 지나고 있는 와중에 조언이 될수 있는 말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만나보기로 했다.
제 각각에 시작, 사진으로 만나다
처음부터 사진을 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특정한 꿈도 없이 무작정 취업이 잘 되는 학과를 선택해야겠다 싶어 상경계열로 진학을 했다. 적응을 잘하진 못했고 점점 소위 말하는 ‘빨갱이’물결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학보사에 들어가면서 대학생활의 절반 이상은 학보사에서 정치·사회·여성 등의 이슈에 눈뜨게 되었다. 사진도 학보사에서 시작하였다. 성격이 소극적인터라 낯선 곳에선 쭈뼛거린다. 그런데 사진을 하게 되면서부터 그런 것이 많이 사라졌다.
특히,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 온 정신이 집중되어 집중이 되어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그 시간이 좋았다. 혼자서 여기저기 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외로움을 느껴 사진 동아리나 모임 등을 물색하였지만 대부분 남자와 아저씨들로 구성된 조합이었고, 그 조합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2010년 퀴어문화축제에서 언니네트워크 회원 소모임인‘어떤사진관’을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사회에서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소위 ‘비정상’ 가족들에 대한 사진전인 <정상가족관람불가 展>에 참여하였다.
박영숙 작가도 사진과 관련된 학과를 학부에서 전공하지는 않으셨다고 한다. 물론, 이후에 석사로 숙명여대산업대학원 사진학을 공부하긴 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진 배우지는 않은 것이다. 요즘에야 사진이 보편화되고 DSLR이 대중들에게 친숙해져서 일명 ‘찍사(사진 찍는 사람의 준말)’들이 넘쳐나고 여성들도 쉬이 카메라를 쥘 수 있게 되었지만 과거의 카메라는 부유한 집안만이 전유할 수 있는 물품이었다.
“박영숙 : 아버지는 기계를 소중히 다루기보단, 그것의 논리가 어떻게 되는 가를 저희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당시 카메라는 지금처럼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집 한 채 가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비싼 물건을 딸이 가지고 노는데도 아버지는 위험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면 박영숙 작가가 사진작가가 된 것이 특별한 집안 환경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개인적인 의지와 꾸준함이 우선되지 않았나 싶다. 여성으로서 사진기를 든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시기이기에, 한 전시장에서 본 사진에 매료되어 카달로그를 사고, 전시장에서 마주친 숙대학보의 기자에게 사진을 배우고 싶다고 매달리게 된 것이 본격적인 사진 인생의 첫 발걸음이었다고 한다.
사진은 남성의 전유물?!
내가 대략 4년간 사진을 찍어오면서 느끼는 것은 여전히 사진은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고, 차별받거나 저평가 되는 경험이 많았다. 인디밴드 웹진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할 당시, 나보다 나이가 5~6살 정도 많은 남성사진가가 있었다. 나는 늘 그에게 밀리는 마이너였다. 물론 그가 사진도 더 잘 찍고 장비도 더 많았다. 거기다 전문사진가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나는 그저 넘쳐나는 찍사들 중 하나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기죽지 않고, 그를 보며 많은 것을 배웠고 빛이 거의 없어 촬영이 어려운 공연사진을 점점 더 나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나의 노력은 ‘대학생, 젊은이의 열정’을 이유로 댓가없이 이용됐다. 돈을 바라거나, 내 사진이 뛰어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작은 관심이나 피드백 정도를 바랬지만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여성’이라서 저평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카메라가 결부된 장소에서 느껴지는 여러 종류의 차별이 있었다. 박영숙 작가도 한 잡지의 기자로 활동할 적, 사진부장과 충돌을 자주 일으켰다고 한다.
“박 - 학교를 졸업하고 1964 ~ 1966년까지는 <여상>이라는 여성잡지 기자로 활동했어요. 제가 기자노릇은 잘하는데 늘 사진부장과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그 사진부장은 두 아이의 아빠였어요. 그러던 어느날 편집장이 저를 부르더니 하는 이야기가 ‘그 사람은 애 있는 아빠이고 네가 직장을 관두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고사직을 받았고 저는 부당해고를 당한 채 쫓겨났죠. 이것이 저를 페미니스트로 만들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여성으로서 오는 차별지점은 많았어요. 언론사에 사진기자로 취직하려고 해도 늘 면접에서 떨어졌는데 그 이유가 ‘여자는 사진기자로 뽑지 않는다’라는 것 때문이었어요.”
요즘에는 여성 사진기자가 있지만 적은 수이며 언론사는 대체로 보수적이라 여성으로서 사진기자가 되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무리 세대를 넘는다고 해도 온전히 해소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런 차별들이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님을 오래전에 사진을 시작한 노년에 작가에게 들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여성주의를 사진으로 담고 싶다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된 것은 학보사의 세미나를 통해서였다. 이전에도 여성이 차별 받는다는 생각은 가정에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알수 없었다. <정상가족관람불가 展>을 준비하면서는 이미지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고, 사진으로 여성주의를 표현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박영숙 작가가 했던 프로젝트들이 대단하게 느껴졌고, 나의 경험은 아주 작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이었다.
“박 - 1975년에 여성단체협의회(이하 여협)가 저에게 여성의 해를 맞이하여 한국의 여성의 현주소를 그려보는 사진전을 해보라고 제안했어요. 총 13섹션이 되는 사진전을 6개월 동안 저 혼자서 진행하였죠. 짐을 머리에 이고 서울로 상경한 여성들이 많은 영등포역, 영등포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성냥갑 같은 집에 살면서 가발공장에서 일을 하는 여성들이 있었죠. 아파트가 처음 생겨난 이촌동에는 행복한 얼굴을 한 여성들도 살고 있는 반면 용산 정도만 들어가도 행상을 하는 여인, 길거리에 아이를 두고 음식 만드는 일을 하는 여인 등 너무 다양한 모습을 한 여성들이 있었죠. 여협의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며 여성주의를 알게 모르게 공부하게 되었고 1985년에는 또 하나의 문화(이하 또문)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죠. 또문을 통해서 여성주의 미술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마녀화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마녀화형을 당한 여성들의 영혼을 위로한다는 의미를 지닌 사진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이 작업이 페미니스트 1세대로서의 제 첫 작품입니다.”
한편으론, 박영숙 작가님과의 만남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열심히 한다지만 여전히 초보로 머물러 있는 것 같은 나 자신. 스스로가 더욱 매진하고 노력해야 된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현실탓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모습. 이런 내 모습을 다시 상기되었다. 이제 막 사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나에게 박영숙 작가는 가감 없는 조언을 해주셨다. 어떤 조언들은 쓰리기도 하였다. 쓰지 않는 약은 없다는 생각으로 새겨들었고, 혼자 성찰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미래에 나에게
사진에 나의 철학을 담아내기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과 고민들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여성으로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 남성과 비등한 여성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의 전유물로 읽히는 카메라를 제자리에 놓고 싶다. 흔히 알려진 ‘미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나의 철학을 담은 미(美)를 그려내고 싶다. 보편적이고 문화적인 영역의 스튜디움(Studium)을 통한 감동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단박에 찌를 수 있는 주관적인 어떤 요소, 푼크툼(Punctum)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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