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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봄 [민우칼럼창] 청년실업 너머, 영원한 축하무대인 삶으로
청년실업 너머, 영원한 축하무대인 삶으로
박 건 여는 민우회 정책위원
2012년 12월 기준 청년실업률은 7.5%로 전체 실업률 2.9%의 2배를 훌쩍 뛰어넘었다.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에 따르면 2012년 8월 기준 20대 비정규직 비율이 47.7%에 이르는데, 이러한 수치는 이들 청년층이 노동시장 진입도 어렵거니와 진입 순간부터 불안한 고용형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이라는 비정규직 함정(trap)의 논리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기만 해도 고용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안정한지 쉽게 느낄 수 있다. 한편 중1부터 고2 학생 6천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조사(작년 12월)에서 이들의 선호직업이 교사, 의사, 공무원 순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사회의 청(소)년들이 자신의 재능과 끼, 그리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갖거나 그렇게 살기를 바라겠지만, 그들이 모험을 포기하고 안정된 직업을 자신의 미래 희망으로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불안정하고 유동적인데, 일부 집단을 제외하고 누가 함부로 자신의 평생을 담보로 모험을 하려고 하겠는가 말이다. 한 순간의 선택이 영원히 자신에게 굴레로 남는 현재의 사회에서 말이다. 그래서 일부의 그런 선택이 더욱 값진 것으로 우리 사회에 회자되겠지만 말이다.
청년에게 굴레 씌우는 사회
“세피아 톤으로 비쳐지는 구역에서 모래로 이루어진 둔덕을 주인공들은 지나간다. 자그마한 둔덕은 인생의 많은 고난을 상징하기라도 하듯이 펼쳐져 있다. 삶의 흔적은 그대로 모래에 각인된다. 회복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흔적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의 역사에 남는다. 개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 자기 홀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의 모습. 그리고 여전히 불안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스스로의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 시대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잠입자(Stalker)’의 한 장면을 나는 이렇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살아온 역사 하나 하나가 오늘의 나를 만들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흔적의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 한번 이른바 ‘잘못된’ 길을 걷게 되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다시 빠져나올 수 없는 불안하고 위험한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청년들이 과연 어떤 꿈과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모든 개인의 행동은 순전히 개인의 우연적인 혹은 선택의 결과로 돌려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사회는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린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강해져야 하고, 또 강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사회에서 낙오자로 낙인찍혀버리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살기 힘들어 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무책임 사회가 주는 압박감과 두려움이 아닐까? 따라서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회를 2번 주고 말고의 문제로 접근할 수 없다. 그동안 실패했던 많은 사람의 마음을 다독거리면서 오디션 프로그램 한 번 더 열어주고, “자, 너희들끼리 이제 공정히 경쟁해보아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갈수록 사회는 ‘사회적 약자들, 소수자들’끼리 토너먼트경쟁을 붙여 결승에 올려놓고, 마지막 하나 남은 1등 티켓을 놓고 싸우게끔 만들고 있다. 이러한 싸움은 뭐랄까, 상황을 극단화시키면 콜로세움에 던져진 노예 검투사의 싸움을 바라보던 로마시대의 귀족과 시민들이 연상된다고 할까? 결국 사회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싸움(혹은 세상)에서 살다가 죽어도 너의 책임이요, 노예(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도 순전히 너의 능력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평하고 공정하다. 그래도 맹수와 싸울 무기는 갖출 수 있게 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이와 같이 불안하고, 유동적이며 무책임한 사회 속에서 몰아쳤던 자기계발 광풍은 긍정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는데 또한 크게 일조하고 있다. 스펙 쌓기 및 시간 관리로 대표되는 자기계발은 사회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차별적 요소를 스스로 내재화하여 자신의 능력부족 혹은 시간관리 실패의 탓으로 전가하는 효과를 갖고 있다. 스스로 엄격하게 자기 관리를 한다면 누구나 성공한다는 긍정적 사고방식이 설사 맞는 말이라고 해도, 시간 관리와 자기관리에 실패했을 때 세상 밖으로 내팽겨 쳐지는 세상이 과연 우리 청년들이 마음 놓고 ‘자기계발’할 수 있는 세상일까? 그러나 오히려 사회나 언론은 ‘50대-20대 고용률 격차 금융위기 때보다 확대’라는 기사를 내보내며, 세대갈등을 부추기는 듯하다. 그 고용의 질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커질 수 없는 파이 한 조각을 두고 우리는 세대끼리도 싸우고, 세대 내에서도 싸우는 형국이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한 싸움을 지속해야 하는 것일까?
마음 놓고 선택할 수 있도록 인정을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회라고 한다면, 치열하게 부딪혀 아파하더라도, 우리(청년 뿐만은 아니다)는 마음 놓고 아파할 수 있을 것이고, 두려움 없이 저 미지의 항로를 선택할 수 있다. 만일 누군가가 저 미지의 항로를 선택하지 않고, 평화로운 항만에 앉아 아픔 없이 지낸다고 해도 그것이 뭐가 또 문제가 되겠는가? 그리고 만일 지금 가지고 있는 사회적 총량이 제한적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사회적 총량을 제대로 분배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진지하게 이루어지고, 계속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또한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보다는, 살아오면서 한 것에 대한 자긍심과 기억을 곱씹으면서 삶을 마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개인의 선택의 결과가 온전하게 자신의 책임으로만 남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단순히 물질적 재화의 재분배나 욕구의 충족만으로 이러한 소망이 이루어질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긍정의 배신』에서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다음과 같이 말한 대목이다.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된다면, 삶은 영원한 축하무대가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이 무대 위에서 재능을 발휘할 것이다(2012:33)” 나는 이 문장에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그러한 재능(在能)이 무엇이던지 상관없이” 우리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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