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여름 [人터뷰] 운동을 이어가는 힘을 엿본 시간,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 강경희를 만나다
운동을 이어가는 힘을 엿본 시간,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 강경희를 만나다
인터뷰 : 강선미(폴) 여는 민우회 여성노동팀, 문성훈(나은) 여는 민우회 여성건강팀
정리 : 여는 민우회 편집팀
한국여성민우회 재정감사를 맡고 계신 강경희 선생님을 만났다. 10여년 간 한국여성재단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여성운동의 한 축으로 활동해 오셨다. 여전히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아시아위민브릿지 두런두런, 재단 살림이 등 사무실 세 곳을 분주히 오가며 일하고 계신다. 최근 타계하신 박영숙 선생님의 단짝과도 같았던 강경희 선생님을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사무실에서 만났다.
처음에 어떻게 사회운동에 참가하시게 되었어요?
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어요. 대학 1학년 때 전국 가톨릭 대학생 협의회 성지순례에 참여해서 미사 반주를 도맡아 했어요. 제가 원래 누가 시키기 전에 알아서 잘 하거든요. 전국 모임에서 이것저것 나서서 하니까 당시 선배들이 저를 열심히 키우려고 했죠. 그러면서 사회의식에 눈을 떴어요. 세미나도 하고 활동도 하고, 덕분에 졸업은 겨우 할 수 있었죠. 졸업 후엔 국제 가톨릭 대학생 운동 아시아 사무국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제가 처음으로 가서 4년 동안 외국에서 많은 걸 배웠어요. 재정도 담당하고 6개국 대상 사업을 담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어도 많이 늘었고요. 그때 정말 많이 성장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천주교 사회문제연구소에서 일했답니다.
가톨릭 운동을 하시면서 교회 안의 성차별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많이 내셨지요?
교회에서도 전반적으로 남성이 주된 역할을 하고 여성이 부수적인 역할을 하는 문제가 있어요.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미사포예요. 미사를 볼 때 여성들이 미사포를 쓰게 되어 있어요. 속설이 여러 가지인데 여성이 하늘을 대할 수 없는 죄인이라서 가려야 한다는 뜻도 있어요. 한국 교회에선 이런 속설이 진하게 남아 있는데 실제 외국 가보면 안 그렇거든요. 제가 미사 반주를 오래 했거든요. 미사포에 항의하는 뜻으로 저는 일부러 안 쓰는데 어떤 분이 와서 씌워 주더라고요. 깜빡했나 하신 거죠. 지인이 제가 이탈리아 여행을 간다니까 미사포를 사다 달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정작 로마에선 그런 걸 별로 찾아볼 수가 없더라고요. 안 쓴다는 얘기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한국에서만 그런지... 얼마 전 영국에서 성공회 미사에서 여성 사제가 집전하는 걸 처음 보고 얼마나 감동받았는지 몰라요. 그 외에도 신부와 수녀에 대한 태도가 많이 다르죠.
여성주의에 관심 있는 사람들도 신앙을 갖는 경우가 많은데요,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 한편으로 신앙과 충돌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대체 어떻게 신앙을 유지하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홍콩에서 일을 마친 뒤 운 좋게 석 달 동안 아일랜드에서 신앙워크숍에 참가한 적이 있어요. 거기에서 어떻게 하면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했는데, 어떤 신부님이 믿음이 충만할 땐 그걸 즐기고, 식었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두라고 하시더군요. 신앙이 끓어오르지 않는다는 걸 걱정하지 말라고, 사제들도 똑같다고요. 그 말이 참 위안이 되어서 편안하게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보통 식사 전, 운전 시작하기 전, 자기 직전에 습관처럼 기도를 하는데 나를 객관적으로 점검해주는 계기인 것 같아요. 명상과 반성의 시간이 되거든요.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여성주의와 종교가 통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처음부터 여성주의자는 아니었어요. 페미니즘은 자기 성찰을 중심으로 만들어가잖아요. 진솔해져야 하고. 저는 그 부분을 종교를 통해서 많이 훈련했거든요. 그래서 여성주의적 성찰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여성재단에서 사무총장으로 오래 일하셨어요.
한국여성노동자회 영문뉴스레터 제작 일을 도와주고 있었어요. 그때 이철순 회장이 여성재단 사무총장 뽑으니까 면접 보라고 제안을 했죠. 사실 그때까지도 여성운동에 대해 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여성평우회가 만들어지던 시절에 토론회에 간 적이 있는데 여자들이 모여서 언쟁을 위한 언쟁을 하는 것 같고 너무 시끄럽기만 하다는 편견을 가지게 된 거죠. 그래서 제가 먼저 석 달 수습기간을 갖겠다고 했어요. 여성재단 일을 하려면 여성NGO들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데 석 달 안에 그런 마음이 생기면 일을 하고, 아니면 안 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일을 시작하고 여성단체들을 찾아다녔죠. 제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일한 적이 있거든요. 지원받는 기관들이 돈 주는 곳에 너무나 굽신굽신 하는, 앞에서만 잘 보이려는 모습들이 종종 있어요. 그런데 여성단체들은 찾아가면 거의 홀대하다시피 하는 거예요. 약속시간 맞춰가도 회의 안 끝났으니 끝날 때까지 알아서 기다리라고 하고. 여성재단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고. 제가 모금 관련 활동 하면서 늘 강조한 것이 ‘주는 손은 겸손하게, 받는 손은 당당하게’예요. 그만큼 자기들의 활동과 운동에 대한 당당함과 자부심이 있다는 게 느껴졌고 그때부터 여성운동에 반했어요. 대표와 활동가들 사이에 격의 없는 모습도 그렇고요.
여성재단에서 박영숙 선생님(전 한국여성재단 이사장)과 인연이 시작되었지요?
박영숙 선생님 리더십은 정말 대단해요. 제가 사무총장이 되고 나서 영어 연설문을 대신 작성해 드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왜 자기 일을 네가 했냐면서 그냥 자유롭게 연설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저 무안하지 말라고 제가 쓴 내용을 섞으시고. 가방 들어 드리려고 했더니 네가 무슨 가방 모찌냐, 네 짐이나 잘 들라며 되레 면박하시고. 처음 일할 땐 공문이 올라올 때마다 하나하나 빨간 펜 들고 고치시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창피하던지. 그런데 한 달이 지나니까 자기한테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앞으로 사무총장이랑 얘기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한 달 동안 지켜보고 저를 믿어 주신 거죠. 사람이 화 낼 때도 있잖아요. 그런데 절대 두 번은 얘기 안 하세요. 돌아가시기 직전 마지막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민우회 활동가들이 보낸 편지를 받고 참 좋아하셨대요.
오랫동안 사회운동을 하고 계신데, 여성운동의 지속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고민하세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에 대한 NGO들의 평가와 성찰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봐요. 그때 갑작스레 정부지원도 늘어났고 재정도 안정화 되고. 준비 없이 ‘사는’ 형편이 갑자기 확 풀려서 부작용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지속가능성의 원동력을 만들기 위해선 투자와 조직적 노력이 같이 가야 해요. 이 문제에 대해서 중요성은 아는데 힘의 안배가 잘 안 되어요. 뒤로 밀려서는 안 되거든요. 운동가가 운 좋게 가족 잘 만나면 오래 버티고 안 그러면 일찍 접고. 이래선 안 돼요. 매년 단체들이 계획 짤 때 늘 미흡한 것 같아요. 특히 리더들이 굳게 마음을 먹어야 해요. 젊은 활동가들은 꿈을 많이 꿀 수 있어야 해요. 반면 오래된 활동가들은 몽상하면 안 돼요. 현실적으로 일을 벌여야 하죠.
마지막으로 민우회에 하고 싶은 말씀은요?
민우회 총회에 가면 여자인 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요. 저는 민우회의 별칭 문화가 참 좋다고 생각해요. 운동은 치고 나가는 게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민우회가 많이 알려진 조직이고 굉장히 커다란 조직이거든요. 생소한 사람들도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좀 더 고민했으면 해요. 멋지긴 한데 다가서기엔 용기도 필요해요. 별칭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치고 나가되 아우르고 문 열어주는 자세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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