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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여름 [문화산책] 여성국극, 매혹의 여성공동체를 만나다
여성국극, 매혹의 여성공동체를 만나다 <왕자가 된 소녀들>
김혜정 연출가
'여성국극'은 왕자, 장군까지 모든 역할을 여성들이 맡아 했던 한국판 국악 뮤지컬이다. 전쟁으로 피폐했던 1950년대에도 요즘 아이돌 뺨치는 인기 남장 배우들이 있었고, 가출에 혈서까지 불사하는 열혈팬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국극이 왜 지금은 기억하는 이조차 없이 사라졌는지 의문이 들게 된다.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은 기록 속에서 사라져간 여성국극의 역사를 발굴해보자는 뜻에서 시작되었다.
단절된 여성들의 문화를 찾아서
여성국극에 대해 알게 된 것은 2007년, ‘여성주의 문화’라는 화두로 일을 벌이고 함께 나이 먹어갈 수 있는 공동체를 모색하던 즈음이다. 1990년대 후반 성정치와 영페미니즘, 다양한 문화운동의 세례 속에서 여성주의적 시각과 실천을 배우고 몸에 익혔던 경험을 잊지 못해, 다시 한 번 여성주의 문화판을 즐겁게 벌여보고자 <문화기획집단 영희야 놀자>를 만들었다. 단절된 여성들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가고자 했던 우리에게 여성국극과의 만남은 반가운 행운이었고, <영희야 놀자>가 실체를 가진 집단으로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여성국극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현재까지 공연되고 있고, 아직도 무대에 서는 노배우들이 있다는 소식에 우리는 그들을 찾아 나섰다. 여성국극 배우와 팬들의 모임인 ‘여성국극 보존회’에 처음 발 디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동네 잔치판에라도 온 듯, 수십 명의 카리스마 넘치는 고령의 여성들이 한상 푸짐하게 차리고 앉아 담소를 나누는데, 차림새는 화사하고 목소리는 할아버지다. 인사를 건네는 이들 중 절반은 우리가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현역 배우들이고, 함께하는 이들은 경력 40~50년의 올드팬들이다.
가슴 벅찼던 여성공동체와의 만남
여성국극에 평생을 바친 배우와 그 팬들을 만나는 일은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이었다. 단순히 지나가버린 옛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그녀들의 공동체와 만나고, 생생한 열정과 전복의 순간들을 현재 진행형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들.
특히, 남자보다 더 남자다운 배우들은 성정체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굳은 관념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성별구분이 무수한 성정체성을 담기는커녕 가두고 제한한다는 것을, 말과 글이 아니라 삶과 몸으로 직접 보여준다. 그녀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생각보다 훨씬 다양했고, 훨씬 자유로웠다.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은 30대의 젊은 여성들이 여성국극이라는 미지의 문을 열고 들어가 세대 너머의 선배들과 만난 짧은 기록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풍부하고 매력적인 이들의 이야기를 한 편의 다큐 속에 모두 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여성국극이라는 멋진 역사가 있었음을, 이들의 빛나는 공동체가 실재함을 알려주는 안내자가 될 뿐, 그 이후의 상상과 해석은 관객들의 몫으로 남겨 놓았다.
왕자를 기다리기보다 왕자가 된 소녀들
그래서일까?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도 가지각색이다. 현재보다도 더 급진적인 여성국극 배우들에게 놀라는 이들도 있고, 좀 더 적나라하게 퀴어문화를 파헤쳤으면 하고 아쉬워하기도 하고, 원조 팬덤을 확인하며 가슴 선덕거리는 아이돌 팬들도 있다. 여성국극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는 과정에 분노하며 여성이 어떻게 역사에서 배제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지나가다 ‘우연히’ 포스터를 보고 영화관을 찾은 왕년의 여성국극 팬들도 종종 만나게 된다. 무엇보다 가슴 뭉클했던 순간은, 이 다큐멘터리의 소식을 들은 김진진 선생님의 오래된 팬이 아들을 통해 죽기 전에 김진진씨를 꼭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며 연락을 취해왔을 때다. 배급사를 잡지 못해 곤란을 겪다가 결국 직접 배급을 진행하였는데, 이런 관객을 만날 때마다 힘들더라도 극장 개봉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왕자를 기다리기보다 왕자가 되기 위해 과감히 집을 나섰던 소녀들이 기나긴 쇠락의 시간을 건너면서도 식지 않은 열정을 간직한 채 함께 모여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동안 적지 않은 감동과 용기를 얻었다. 이제는 더 많은 관객들이 이 ‘매혹적인 공동체’를 만나길 바란다.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은 온라인과 지역상영, 공동체상영 등을 통해 계속 만나볼 수 있다.
* 상영정보 및 공동체 상영문의: http://blog.naver.com/girlpr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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