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하반기호 [민우ing] 세입자로 살아도 괜찮고 싶은 우리에게 필요한 세 가지
세입자로 살아도 괜찮고 싶은 우리에게 필요한 세 가지
권박미숙(먼지)| 여는 민우회 성평등복지팀
올해도 겨울은 춥다. 칼바람 속에 어깨를 웅크리며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가면 몸도 마음도 편히 녹일 수 있겠지. 걸음을 서두른다. 현관문을 연다. 그런데 서글프게도 집이 바깥만큼 춥다. 대체 뭘로 만든 벽인지 바람이 숭숭 든다. 보일러를 틀어도 가스계량기만 돌아갈 뿐, 바닥 냉기가 사라지는 정도이다. 차가운 집 안 공기 속에서 한숨을 쉬어 봐도 하얀 입김에 실내온도만 확인 될 뿐, 시린 코끝에 서러움이 핑 돈다. 집주인에게 전화를 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날 풀리면 괜찮다” 는 대답뿐이다. 우산 장수에게 우산이 샌다고 말하니 비가 그치면 괜찮다고 하는 격이다. 헛웃음만 나온다. 비가 올 때 비를 피하려고 쓰는 게 우산이 아닌가. 날이 추울 때 추위를 피하려고 지은 게 집이 아닌가.
당신도 겪어본 일인가? 이 이야기는 성평등복지팀에서 4~8월에 진행한 비혼 여성 세입자 릴레이 인터뷰*에서 드러난 세입자살이의 한 단면이다. 가난한 세입자들은 생활비의 절반 가까이를 월세로 내면서도, 동파, 누수, 해충, 곰팡이, 추위, 더위, 침입 걱정을 달고 산다. 집수리를 요청해 보지만 성공여부는 집주인의 선심 정도에 달려 있음을 실감하게 될 뿐이다. 거기다 비혼 여성 세입자는 나이와 성별의 위계 망 속에 ‘어린’ ‘여성’으로 위치 지어지니 이런 상황에서 협상력을 확보하기가 더 어렵다.
민우회 성평등복지팀은 2014년 한 해 동안 ‘주거-복지-1인 가구-여성’을 키워드로 활동했다. 인터뷰에 이어 6월부터는 세입자들의 현실을 바꿔보자는 시민들과 ‘세입자 주거권 액션단 HOUSE & PEACE’를 만들었다. 그리고 세입자로 살아도 괜찮은 사회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이야기해 나갔다.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노하우이다. ‘집 보는 눈 체크리스트’나, ‘집수리 비법’ 같은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한 노하우, ‘세입자 손자병법 부동산 편과 집주인편’ 같은 협상 노하우가 세입자에겐 필요하다. 노하우란 경험 속에서 터득한 비법을 의미하는 말이다. 노하우를 모으려면 경험자들의 연대, 즉 세입자들의 연대가 필수이다. 세입자들의 경험을 드러냈던 인터뷰들, 그리고 매번 성토와 공감 속에 진행되었던 액션단 모임이 바로 그 연대의 장이 되었다.
11월 4일에 있었던 ‘세입자 말하기대회 - 내가 사는 그 집’ 역시 이런 연대의 장이었다. 인터뷰이들과 액션단 그리고 더 많은 비혼 여성 세입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세입자를 때려치우고 집을 사고 싶게 만드는 세상에 대해,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독립은 하고 싶지만 주거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인 현실에 대해, 집주인/세입자의 역학 관계에 더해진 나이 많은 남성/나이 어린 여성의 역학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미스 김’ 운운과 집주인 무단침입과 절대 해주지 않는 집수리에 대해, 춥고 덥고 습하고 냄새나고 시끄러운 그 집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했던 라디에이터와 제습기와 베이킹소다와 귀마개에 대해, 이 모든 과정에서 쌓인 금쪽같은 세입자 생존 노하우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분노의 맞장구와 공감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던 시간이었다.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은 정보이다. 안전한 계약서를 쓰기 위해, 집수리 책임 소재로 분쟁을 겪거나 보증금을 떼일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세입자에게 주택임대차보호법 이해는 필수다. 하지만 법이 있어도 말이 어려워 세입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게 지금의 문제이다. 성평등복지팀과 액션단은 관련 전문가들을 만나 정보를 얻고 접근하기 쉬운말로 이 정보들을 풀이하는 작업도 함께 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노하우나 정보가 없어도 괜찮을 수 있게 해주는 안전망, 바로 주거복지제도이다. 공공임대주택과 주거급여는 대표적인 주거복지제도이다. 하지만 두 제도 모두 특정한 자격을 만족시키는 이들만 이용할 수 있다. 그럼 자격 밖의 사람들은? 결국 돈을 벌어 내 집을 사야만 세입자의 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까? 사실 현행 제도는 이런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설계되어 있다. 다른 시나리오는 어떻게 가능할까.
‘세입자 말하기대회 - 내가 사는 그 집’ 행사장에는 인터뷰이들이 그린 ‘나의 최악의 집’ 단면도와 함께 인터뷰이들의 이야기도 전시가 되었다. 그 중 한 문장이 의미심장했다. “세입자는 삶의 안정감 같은 감각을 경험할 수가 없다. 마치 비정규직같은 느낌.” 비정규직이 겪는 삶의 불안은 단지 고용 기간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용에 대한 결정권이 사용자에게 있고 그 결정권을 너무 자주 행사할 수 있으니 자연히 사용자에게 유리한 힘의 역학이 생긴다. 그 역학 관계 안에서는 노동 조건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의 삶이 불안정한 이유이다. 세입자도 같다. 집주인은 2년마다 집세 인상을 요구할 수 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재계약은 어렵다. 이 결정권이 집주인에게 있고, 집주인과 세입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협상들은 모두 이 그늘 아래서 벌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세입자는 약자가 된다. 그러니 주거복지의 시작은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일 수밖에 없다. 세입자인 우리가 임대차 등록제, 전월세상한제, 계약갱신청구권 도입 같은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 노력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현행 주거복지 제도의 차별적 요소도 개선해야 한다. 1인 가구가 늘고 있는 만큼 1인 가구 전용 공공임대주택을 짓는 등 제도적 대응도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1인 가구지만 현실적으로는 1인 가구가 아닌 사람들도 있다. 혼인과 혈연만을 가족 구성의 조건으로 인정하는 현행 법 안에서는, 그 외의 계기로 가족을 구성한 공동체 가족은 각각의 구성원이 1인 가구로 집계될 뿐, 가족인 상황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행 공공임대주택 제도 역시 이런 사각지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데, 공동체 가구에도 공공임대주택 신청 자격을 부여하는 등의 개선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더욱이 우리가 저출산 대책으로 싱글세를 운운하며, 다양해지는 삶의 형태에 대한 몰이해를 들키고 마는 정부를 가진 국민이기에 이 부분을 더욱 주시해야 한다.
이런 제도적 변화는 결국 성평등복지라는 새로운 의제를 주거복지 영역에도 적극 반영해야 가능한 일들이다. 이제까지 ‘복지’는 사회약자들을 돕는 제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복지’는 사회약자를 만들어 내는 구조에 대해 질문하고, 누군가를 약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무엇이 기본권이 되어야 하는지를 합의해 가는 과정이 되면 좋겠다. 그리고 그 과정이 소수자의 입장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성평등 관점으로 진행되어야,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복지’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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