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하반기호 [활동가다이어리] 활동가에서 연기 꿈나무가 된 사연
활동가에서 연기 꿈나무가 된 사연
류형림(모구)| 여는 민우회 여성노동팀 활동가
2014년 10월 31일, 나는 연극배우로 무대에 섰다. 그것도 대학로 극장에서! 내가 연극배우로 무대에 서는 날이 올 줄이야! 사실 그리 거창하게 시작한 건 아니었다. 어쩌다 눈에 들어온 ‘2014 시민인권연극단’ 모집 홍보물. 멍하니 고민하기 시작했다. ‘할 일은 태산이고 공연을 올릴 하반기에는 민우회에서 맡은 사업 마무리하느라 바쁠 텐데 괜찮을까?’, ‘연극 아니라도 벌여놓은 일이 많은데, 시간이 될까?’, ‘한 번도 안 해본 일인데 대본을 쓰든 연기를 하든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제대로 못할 거면 안하는 게 낫지 않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줄이 이어지는 걱정과 고민을 콱 눌러버린 건 도전해보자는 마음이었다. 내 평생 무대에 설 기회가 흔하게 있겠는가. 기회가 있을 때 눈 딱 감고 해보자. 나중에 ‘그 때 해볼 걸’ 하며 후회하고 싶진 않았다. 아, 신청했다. 이젠 돌이킬수 없어!
시민인권연극단의 첫 모임은 인권 공감 워크숍으로 시작했다. 다양한 연령대, 낯선 얼굴의 사람들이 한 무더기 모였다. 언제나 그렇듯 첫 만남은 어색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어색함이 다는 아니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나는 연극 무대에서 인권을 이야기해보겠다고 나선 사람들과 만나는 시민인권연극단 첫 모임에 묘한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나갔던 것 같다. 적어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인권의 맥락에서 맞닿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인권연극을 만드는 과정이, 좁다면 좁은 나의 세계에 즐겁고 짜릿한 긴장을 가져다주길 기대했다.
내가 주연배우로 나서게 된 연극의 제목은 ‘내 걱정 좀 그만해줄래?’다. 이건 바로 대동단결의 그 날에 나온 것! 내가 속한 팀이 연기 연습할 시간도 없는 와중에,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했던 건 무대에서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할지 주제를 정하는 거였다. 몇 주에 걸쳐 지난한 토론이 벌어졌다.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속 얘기를 양파껍질을 까듯이 조금씩 까발려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명절 즈음에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살 빼라.’, ‘연애 안 하냐,’ ‘왜 그러고 사냐.’는 말을 해대는 친척들 욕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새 살살 신경을 긁는 친구 욕으로 주제가 넘어가더니, 우린 결국 주변 사람들이 걱정이랍시고 오지랖부리는 게 엄청 짜증난다는 합의점에 신나게 도달했다. 내 걱정 좀 그만하라는 주제를 놓고 하나둘씩 당사자의 사연을 모아 대본을 완성했다. 내가 맡게 된 역
할은 인터넷 방송 진행자였다. 오지랖 부리는 사람에게 시원하게 한 마디 해달라는 사연을 받아서 욕도 하고 발차기도 하고 샌드백도 후려치는 광기어린 ‘이류’라는 인물이다. 이소룡의 노란 체육복을 입고 나와서는 킬빌의 우마 서먼이라 우기는 ‘이류’가 되기 위해, 생전 처음 이소룡의 노란 체육복을 입어봤다. 많은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보내고 손 하나 까딱하기 귀찮아하는 내가 무대 위를 뛰어다니고 연습 때마다 발차기를 수십 번씩 해댔다. 평생 할 발차기를 다 한 것 같았다. 샌드백을 후려치는 연습을 하다 부러뜨린, 연출 씨앙의 추억이 잔뜩 담긴 목검, 플라스틱 봉, 소품용 검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연습 한번 할 때마다 소품이 한 두 개씩 박살 났던 초호화 액션 연극이었다.
글을 쓰게 되면서 연극에 도전한 시간이 나에게 무엇을 남겨줬을까 곰곰이 되짚어봤다. 사실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3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까마득할 정도로 공연은 휙 지나가버렸다. 그래도 확실히 드는 생각은 도전하길 참 잘했다는 거다. 나의 이야기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무대에서 이야기하는 건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상처받았던 내 경험을 ‘이류’가 되어 마음껏 화내고 때려 부수면서 나도 모르게 조금은 시원해진 것 같다. 함께 공연을 만든 이들도 그랬을 거다. 비록 풀어내고 싶었던 이야기를 충분히 담지는 못했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과 몇 달 간 부대끼며 자신의 삶에서 첨예한 부분들을 털어놓고, 그것을 무대에서 조금이나마 보여줄수 있었다는 게 나는 참 좋았다. 거사를 함께 치르면서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이야기들을 많이 나눴기에, 이제는 술 한 잔하며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충분히 즐겁게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도 참 기쁘다. 그리고 나를 보러 와줬던 고마운 사람들이 떠오른다. 무대에 서면 아무것도 안보인다는 말에 그러려니 했었는데, 강한 조명이 비추는 무대에 직접 서보니 진짜 그랬다. 하지만 무대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객석에 있는 지인들의 얼굴이 하나 둘 보였다. 처음 서는 무대라 긴장했지만 그럭저럭 잘할 수 있었던 건 나를 보러 와줬던 사람들 때문인 것 같다. 무대에서 보이는 얼굴 하나하나가 참힘이 되더라. ‘연기 꿈나무’ 라며 나의 연기를 평해준폴 활동가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
정신없이 일상을 살다가도 문득 떠올리게 되는건, 무대에 나가기 직전 쿵쾅쿵쾅 심장이 뛰는 걸 느끼며 무대 뒤에 서 있었던 순간이다. 정신없이 뛰어 다니느라 긴장할 새도 없었던 무대 위와 달리 홀로 우뚝 서서 호흡을 가다듬던 고요한 그 순간. 기대보다 더 연극 무대는 나를 설레게 했다. 어쩌면 다시 도전할지도 모르겠다. 무대 위에서 재잘재잘 떠들고 싶은 이야기가 생긴다면.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