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술 따르기 강요'는 명백한 성희롱임을 부정한 재판부를 규탄한다
【성명서】‘술 따르기 강요’는 명백한 성희롱임을 부정한 재판부를 규탄한다
2월 11일, 서울행정법원은 회식자리에서 여성교사로 하여금 남성교장에게 술을 따르도록 강요한 것이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여성부 남녀차별개선위원회의 결정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에 의하면 교감이 여성교사로 하여금 남성교장에게 술을 따르도록 한 것은 우리 사회공동체의 건전한 상식과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선량한 풍속 또는 사회질서에 위반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직장내 성희롱의 심각성을 외면하는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재판부는 여성교사들로 하여금 교장에게 술을 따르도록 하였던 것은 회식장소에서 “부하직원이 상사로부터 술을 받았으면 답례로 상사에게 술을 권하여야 한다는 차원에서의 언행”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성희롱이 아닌, 서로가 술을 주고받는 자연스러운 행위로 용인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행동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서로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수평적인 관계가 아닌, 교감과 평교사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러한 위계 하에서 여성교사는 술을 따르라는 ‘권유’를 권유가 아닌 ‘강요’로 느낄 수밖에 없다. 특히 술을 따르라는 ‘권유’가 여성을 향해 행해졌을 경우, 일반적으로 직장 내에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성적인 역할’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이는 여성에게 성적인 불쾌감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노동부는 남녀고용평등법 시행규칙 제2조(직장내 성희롱 판단기준의 예시)를 통해서 회식자리 등에서 술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행위는 직장내 성희롱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판단은 수년간의 조사와 상담을 통해 술 따르기 강요 등 회식자리에서의 빈번한 성희롱이 여성의 인권과 노동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임을 밝혀 온 결과로서 확립된 것이다. 이번 서울행정법원의 판단은 이러한 오랜 노력의 결과에 반하는 것으로서 개탄을 금할 수 없으며, 이후 이 판결이 미칠 영향에 대하여 심히 우려스러울 뿐이다. 뿐만 아니라 서울행정법원은 이 사건을 성희롱으로 볼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로 가해자가 “성적의도를 가지고 언행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과 당사자인 여성 교사를 제외한 “다른 여자교사들은 교감이 교장에게 술을 따라드리라는 취지의 말을 하여 불쾌하게 생각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지는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이러한 재판부의 판단은 성희롱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피해자의 관점”이 주요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관점을 철저히 무시하고 하고 있다.
직장내 성희롱은 가해자가 성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가의 여부에 따라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원하는 행동이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이러한 피해자 관점은 노동부와 여성부에서도 직장내 성희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채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직장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선도적인 판결을 이끌어 온 서구의 재판부에서도 주요하게 채택하고 있는 관점으로서 그 중요성이 관한 한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피해자의 입장보다는 가해자의 의도와 제3자의 느낌을 주요한 판단의 근거로 채택하고 있다는 것은 직장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확립되어 온 주요 개념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회식자리에서 술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행위가 풍속과 사회질서를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는 점 또한 피해자인 여성의 관점을 전혀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 결과라고 하겠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지난 2002년 “회식문화를 바꾸자”는 캠페인을 통해 남성중심적인 회식문화를 개선하고 회식자리에서의 성희롱을 근절하기 위한 노력을 펼쳤고, 사회적으로 큰 호응과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이는 회식자리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성희롱이 여성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에 있어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캠페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회식문화 관행과 의식에 대한 변화의 확산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에서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이 다시금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은 너무나 명백하다. 법원은 법을 집행하는 기관으로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차별에 대하여 책임감 있는 판단을 내려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이번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을 규탄하며, 직장내 성희롱을 근절하고 여성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보호하며, 궁극적으로 성평등한 사회를 구현하는데 법원이 보다 앞장설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2004. 2. 13.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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