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여성의 경험, 그들의 관성
여성의 경험, 그들의 관성 김창연 : 여성노동센터 상근활동가 대학생들에게 '나의 성애사(sexual history)'를 주제로 글을 쓰라고 하면, 남학생들은 대개 매춘 경험을 쓰고 여학생들은 성폭력 경험에 대해 쓴다. 말하기 방식도 상반된다. 남성들은 '본인의 경험을 통해 한국사회 성문화를 진단하겠다'며 자신을 기꺼이 보편적 인간으로 위치시킨다. 그러나 여성들은 '일반화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일 뿐입니다'라고 쓴다. 섹슈얼리티가 사적인 것이 아니라 여성의 섹슈얼리티, 경험, 언어가 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강간이냐 화간이냐'는 식으로 성폭력 경험의 객관성을 논하기 전에, 이미 여성과 남성이 모두 자기의 경험을 인식, 재현하는 과정 자체가 깊숙이 성별화(gendered)되어 있음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언어와 경험 해석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과정과 맥락을 무시한 채, 마치 현재 삶의 조건이 투명하고 객관적인 것처럼 간주되는 상황에서 여성이 지배언어에 위반되는 자기 경험을 말할 수 있을까? 여성의 경험과 언어가 불일치하는 사회에서, 여성이 자기분열을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인식체계를 상대화해야 한다. 삶의 순간 순간이 특수한 정치적 조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많은 경우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말하기 위해 끊임없이 설득하고 설명하며 이해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분노의 표출이거나 설득과 설명이거나 아니면 그 둘 사이의 줄타기. 여성은 왜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없을까. 왜 어떤 여성이 자신의 경험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혹은 "그것이 나에게는 이런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설득과 설명을 필요로 할까. 왜 여성이 여성으로서 말하는 것은 언제나 정치적인 행위일까. 지난 2월 11일, 서울행정법원이 회식자리에서 남성교감이 여성교사로 하여금 남성교장에게 술을 따르도록 강요한 것이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여성부 남녀차별개선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하라고 내린 판결은 여성의 경험을 이야기한다는 것의 어려움, 그 정치성을 잘 드러내 보여준 사건이었다. 행정법원의 판결 자체도 그랬거니와 이 사건이 남성들에게 읽혀지는 방식 또한 그러했다. 민우회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발표한 성명서를 읽고 한 남성이 보내 온 메일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보편적 가치 vs. 사적인 감정 : 주도(酒道) vs. 성희롱 그 남성이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술 따르기가 성희롱이 아니라 술자리에서 누구나 지켜야 하는 예절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언설을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짚고 넘어갈 게 있는데 바로 예의에 관한 겁니다. 어차피 예의라 함은 사람마다 정해 놓은 범위가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사회 문화 속에서 예의의 범위는 거의 비슷하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술자리에서 술 따르기를 강요하였다고 하는데 그전에 생각해 볼 것은 술자리 문화라는 것입니다. 술자리 문화라 하면 여성을 하나의 유희로서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酒道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윗사람이 술을 권할 경우 술을 마시고 다시 어른께 따라 드려야 하는 것이 예절입니다. 이것은 남녀의 문제를 떠나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서로에 대한 예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남성에게 있어 여성에 대한 술 따르기 강요는 성희롱이 아니라 예의범절에 대한 가르침으로 읽히고 있다. 남성의 경험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로 인식되고 여성의 경험은 그 가치에서 벗어나는, 그래서 남성의 가르침이 필요한 사사로운 일탈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에게 술 따르기 강요가 성희롱이라는 여성교사, 여성부, 여성단체들의 의견은 오히려 '그'에 대한 차별일 뿐이다. 그런 상황을 보고 있는 윗사람이 또는 동년배가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바른 예절을 가르쳐 주는 게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솔직히 제가 만약 그 교장이었다면 "네가 너의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술 따르기를 거부했는데, 나는 그것을 주도가 없다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또한 나는 주도가 없는 사람과 술을 마시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자리에 있는 게 거북하다"라는 말을 하며 자리를 나왔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분명히 그 예의 없는 여교사는 '술을 안 따랐다고 피해를 봤다'하며 고발을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가 이건 역성차별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여성운동단체의 이러한 역차별성 주장은 "그"에게 여성우월주의에 다름 아니다. 제가 볼 땐 정말이지 교감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술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아랫사람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모습이 너무 불쌍할 따름입니다. 만취한 상태에서 노골적으로 여성에게만 술을 권하지도 않았고 그런 전례(성희롱)도 없는 윗사람을 단지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희롱이라고 고발하는 것은 어리석은 여성운동의 극치를 보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 나라의 여성인권 문제는 정말이지 저부터 고치고 나아가서는 앞장서고 싶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여성운동에 대해서 아주 떳떳이 주장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여성운동을 저해하는 내부의 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성문제는 '여성이기에 '가 아닌 '같은 인간으로서 '라고 시작되어야 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인간이고 사람인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는다'가 되어야 하는데 '여성이기에 존중해라'라는 식의 주장은 남성우월주의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이번 서울행정법원 판결을 둘러싼 일련의 주장들이 역차별이며 여성우월주의로 읽혀지는 이유는 그것이 보편적 가치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전부터 많은 여성문제를 접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여성들이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며 그 취지를 공감"해 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때의 "그"가 공감하는 취지라 함은 "인간으로서"라는 대명제로 시작하는 보편적 가치에 크게 저항하지 않는 선에서의 것이다. 문제는 "그"가 생각하는 보편적 가치라는 것이 사실은 사고의 관성이라는 데 있다. 사고에서의 관성의 법칙 상당히 많은 잘못된 관행과 고쳐져야 할 관습이 '도리' 혹은 '예절, 예의'라는 미명하에 지켜지고 있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이 피해를 낳는 부분이 있다고 여겨지면 고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고와 행동이 가지고 있는 관성은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듣고 어떻게 말할까
자신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관성을 깨고 맥락의 차이를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험이 완전체가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 같다. 자신의 경험을 상대화하는 것, 이는 또한 스스로를 성찰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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