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걸렸어] 여권 만들어 보셨나요?
여권 만들어 보셨나요?
홍 지 명 : 여성노동센터 회원, 여성주의인권위원회
드디어 꿈꾸던 여행을 가게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다른 나라에 가게 된 것이다. 여행준비에 돌입, 처음으로 한 일은 여권을 만드는 일이었다. 여행책자에 나온 대로 제일 잘 나온 사진 두 장을 들고 부푼 마음으로 남편과 구청에 갔다.
그.런.데. 여권신청서를 보니 난데없는 본적(本籍)란이 있었다. 호주, 호주와의 관계, 그리고 직계가족사항을 쓰는 칸도 있었다. 기혼여성인 경우 남편의 성(姓)도 써넣어야 했다. 순간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아니, 주민등록증에서도 사라진 '본적'을 왜 적어야 하는지, 호주는 뭔지, 남편 성은 또 뭔지,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담당직원에게 물어봤다. "이것도 다 적어야 하나요?" 직원은 예의 근엄한 표정으로 "다~ 적어야 합니다. 한 칸도 빠짐없이." "아, 네~" 왜 관(官)에만 가면 괜히 죄진 사람처럼 주눅이 들고 어리버리해지는 걸까. 한마디 문제제기도 못하고 신청서 쓰는 테이블로 돌아와 남들 들으라는 듯 투덜거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열심히 쓰고 있었다.
나는 아직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호주는 아버지이고, 나의 본적은 아버지의 본적이다. 그러니 내가 본적을 어찌 기억하고 있겠는가. 여권은 만들어야겠고, 본적을 알려면 부모님께 여쭤봐야 하고, 그러면 혼인신고를 한 줄 알고 계신 부모님은 뭔 일이냐고 물으실 게 뻔하다. 부모님한테 들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왜 이런 것들이 필요한지, 왜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지, 귀찮은데 차라리 확 혼인신고를 해버릴까,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넓디넓은 구청 안에서 외딴 섬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결국 어머니랑 통화해서 본적을 알아내긴 했으나 신청서를 한칸 한칸 쓰면서 '도대체 나는 이 나라에서 무엇으로 규정되는가?'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 한 편이 심하게 구겨지다 못해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결혼해서 집을 얻고 확정일자 받으러 갔을 때도 그랬다. 비록 전셋집이긴 했지만 공동명의로 하려고 동사무소에 물어봤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뭘 그렇게 일을 복잡하게 처리하려고 하느냐' 뭐 이런 내용의 답변을 들었다. 혼인신고를 하려고 갔을 때도 장남은 분가를 할 수가 없고 내가 시가의 호적에 들어가는 방법 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기로 했었다. 아, 이 지긋지긋한 남성위주의 혈족관계!! (나중에 인터넷으로 알아봤더니 '공동명의'로 할 수도 있었고 장남도 '강제분가'라는 복잡한 방법이 있긴 있었다.)
나름대로 평등한 부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이런 행정시스템을 접하게 될 때마다 나는 무너지는 자존심을 추스르기 힘들다. 혼인한 여성은 남성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사회자체가 규정하고 있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데 남편 없이는 불가능한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아무리 '평등부부'를 꿈꾼다 하더라도 법적으로는 '일 복잡하게 만드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일뿐이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달라질까? 나는 언제쯤이나 있는 그대로의 '나'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호주제 폐지에 관해서 혹자는 '피해, 피해 하는데 그렇게 피해당한 사람이 많냐, 너는 호주제 때문에 무슨 피해를 당했냐?'고 한다. 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난 여권 만들면서도 피해봤다. 나도 모르는 내 '본적' 때문에 내 존재감이 깃털만큼 가벼워졌다. 이런 정신적 피해는 어찌할꺼냐' 라고. 그리고 앞으로 여권을 만들러 갈 여성들에게는 사진 2장만 아니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라고 얘기해 줄 것이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