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의 노동생각] 어설픈 축하를 받으며
어설픈 축하를 받으며
이 지 현 : 여성노동센터 회원
신문의 만화에 '무대리'라는 캐릭터가 있다. 그 나이에 아직도 대리인데다가 노력도 안하고 재능도 없는, 그렇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그런 캐릭터란다.
올 초 불혹의 나이를 넘겨 그것도 한 직장에서 장장 17년만에 드디어 나도 '이대리'가 되었다. 어렵게 따낸 근속승진이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 그러나 아직도 만년 말단에서 허덕이고 있는 동료들과 수많은 여직원들이 있기에 그나마 나로서는 그렇게 운 나쁜 축은 아니었다.
여직원들의 승진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
87년, 89년 대규모 공채로 한꺼번에 입사한 동료들은 나름대로 첫 직장생활이란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수년이 지나자 모두들 인사적체에 허덕이고 희망 없는 미래에 의욕을 잃어갔다. 그 당시 오죽하면 농담 삼아 누가 죽어야지 한자리 생긴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사막에서 샘을 찾는 것만큼 어려운 승진자리에 그나마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만큼 더 힘든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여직원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인데, 그 당시에는 채용에서부터 차별이 존재했다. 여성들은 최하위직급인 6급에만 응시할 수 있었다. 아무리 조건이 좋고 능력이 탁월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취업기회를 한정하는 그 당시의 엄연한 현실은 두고두고 많은 여직원들에게 좌절과 분노로 이어져 왔다. 세월이 지나 그나마 승진자리가 비었을 때도 그 몫은 항상 남직원들 차지였다.
90년도 초에 우리 사무실에는 같은 직급인 남녀가 20여명 있었는데 그 동안 남직원 6명만 내리 승진이 되었다. 그 당시 여성운동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여직원들 모두와 함께 최고 책임자를 만나 여직원들을 승진시키지 않는 이유를 따졌다. 그랬더니 이유 중 하나가 한 가정의 가장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요즘엔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여성들에 대한 승진차별은 변하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누구나 공감하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남성들이 먼저 승진하는 이유
우리 직장에서 작년에 처음으로 단체협상을 통해 근무평정을 열람한 적이 있었다. 간부들이 누구씨 없으면 우리 팀 안 돌아간다며 공공연히 칭찬 받았던 여직원이나, 온갖 궂은 일 마다 않고 하여 매번 힘든 부서만 전전했던 여직원이나, 최일선인 민원 부서에서 목이 쉬어라 일했던 여직원들이나 막상 근무평정 뚜껑을 열어 보았을 때는 모두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적으로 여성들이 근무평정 하위 그룹에 분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짐작은 했지만 '설마'라는 기대가 있었기에 분노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간부 중에 어떤 사람이 양심고백 비슷하게 한 적이 있다. 그가 말하길 팀 내에서 일 잘하는 여직원과 그저 그런 남직원이 있었는데 막상 근무평정을 줄 때는 자신도 모르게 남직원에게 후한 점수를 주게 되더라는 것이다. 대단한 남성들의 결집력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승진을 만들어 왔는지 잘 알고 있다, 근무시간에는 최대한 업무를 늘이고, 상사보다 일찍 출근 늦게 퇴근하며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 할 것. 상사가 아무리 잘못해도 대들지 않으며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할 것. 동료들에게는 자판기 커피 한 잔 사지 않아도 상사들의 경조사는 칼 같이 챙길 것. 아무리 바빠도 회식자리에는 반드시 참석하여 눈도장을 찍을 것. 더 나아가 간부들과의 폭넓은 유대를 위해 사적인 술자리를 주기적으로 가질 것 등등.
우리 여성들은 다 알면서도 실천을 못한다. 아니 당당히 거부한다. 개인적인 관계가 아닌 객관적인 업무 능력으로 인정받고 당당히 승진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승진을 좌지우지하는 간부들을 바꾸던가 회사의 승진 시스템을 바꿀 수밖에 없다. 그러면 더 이상 회식자리가 불편하지도 않고 일 의외의 것으로 능력을 평가받는 문화도 없어지지 않을까.
그녀들과 그들의 정당한 리그를 위해
오늘도 곤한 몸으로 하루를 마감한 여직원들은 사무실 근처 술집으로 향한다. 사내부부, 맞벌이부부, 정리해고 대상이라는 산을 넘어 입사했을 때의 뽀송뽀송 했던 얼굴들은 간데 없고 어느덧 중년의 문턱을 들어 선 동료들이다. "누가 더 오래 직장에서 버티나 두고 보자", "억울해서라도 정년까지 다닐 거다"라고 말들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는 정말 흐뭇하다. 그리고 다짐한다.
'그래 1급, 특1급이 될 때까지 다녀야지. 그래서 이 직장에 여직원이 넘쳐나고 여성인 상사에게 결재 받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그 날까지 열심히 싸워 보자'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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