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미완성의 연주를 시작하며
미완성의 연주를 시작하며
서 민 자 : 여성노동센터 상근활동가
어느 날 40대 초반의 여성노동자 한 분이 민우회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 여성노동자는 17년 동안 일한 일터에서 40세 직급정년으로 인해 퇴직 당해 법원에서 부당성을 다투고 있는 중이었다. 15년만의 승진, 승진한지 1년 1개월만의 정년퇴직... 갑자기 그 여성노동자가 경험한 '노동'에 신경이 쏠렸다.
인간이 경험한 과거 전체를 역사라고 하는데, 그 여성노동자가 경험한 노동, 그 여성노동자의 '노동의 역사'는 과연 어땠을까? 고용상의 성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남녀고용평등법의 역사와 그 여성노동자의 노동의 역사가 일정한 괘를 같이하고 있고, 그 여성노동자가 경험한 노동의 역사 안에 또 다른 그녀들의 역사가 있음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된다.
노동의 시작, 그 불협화음의 출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으니 강산이 두 번 바뀌기 전인 1985년,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기 전이다. 이 여성노동자는 한국전기공사협회(이하 협회)에 최하위직급인 행정직 6직급으로 입사하였다. 그 당시 한국전기공사협회의 인사규정은 다음과 같다.
5급 - 고등학교 졸업자 또는 문교부장관이 인정하는 동등이상의자격자로서 1년 이상 보직 예정직의 경력이 있는 자
6급 - 고등학교 졸업자 도는 문교부장관이 인정하는 동등이상의자격자
위의 인사규정에 따르면 5급과 6급 채용 자격에서 동일한 점은 학력이고, 차이점이라면 협회의 근무경력 여부이다. 이 여성노동자의 경우 협회에서 일용직으로 6개월간 근무한 경력이 있고, 5급에 채용된 남성보다 학력이 더 높음에도 6급으로 채용되었다. 협회가 이 여성노동자보다 학력이 낮고(학력여부가 차별적 채용의 합리적 근거가 될 수 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근무경력이 없는 남성을 5급으로 채용한 사실을 본다면 협회의 채용 자격기준은 '성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근 20년 동안 협회의 6급에는 전원 여성만이, 5급에는 전원 남성만이 채용된 사실 속에서도 확인된다.
능력이나 자격에 상관없이 여성을 남성보다 낮은 직급에 채용한 이유에 대해 회사측에서는 협회의 특성상 회원사(협회 소속의 기업)들의 추천을 받아서 채용을 하는데, 6급에는 여성이, 5급에는 남성이 추천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도적으로 여성은 6직급에, 남성은 5직급에 채용하는 차별을 한 것이 아니라 하다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 거짓말에 기가 차기도 했지만, 회사측의 주장이 진정으로 사실이라면 더욱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회사측의 주장은 6직급에는 여성만 추천하고 5직급에는 남성만 추천해야 한다는 어떠한 규정이나 채용관행도 없었지만 회원사들이 알아서 추천을 해 왔고, 추천에 따라 채용하다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전국에 흩어져 있는 만여개의 협회 회원사들이 6직급에 결원이 생기면 여성을, 5직급에는 남성을 추천하여야 한다는 그 생각을, 그 관행을, 그것도 20년! 동안 단 한번도 틀리지 않고, 동/일/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정말 대대손손 이어지는 차별의식인가? 아니면 회사측이 거짓 주장을 하는 것일까?
여성노동의 역사, 여성에게 승진이란 없다?
협회는 여성노동자들의 승진을 제한하기 위해 특별한 프로젝트를 감행한다. 1986년, 6직급을 없애고 '상용직'이라는 직제를 신설하여 여성노동자 전원을 상용직에 묶어 두었다. 이 상용직은 기존 직제와는 전혀 다른 별도의 직제로, 다른 직제로의 이동은 차단되었다. 또 상용직 안에 별도의 승진규정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호봉만 승급되는 직제였다. 상용직제 신설로 여성노동자 전원은 이전과 동일한 업무를 함에도 불구하고 승진 자체가 차단되는 직제에 속하게 되었다. 반면에 5직급에 채용된 남성들은 협회의 기존 직급체계에 따라 승진이 되었다. 이로 인해 상용직이 운영되는 10년간 단 한 명의 여성노동자도 승진하지 못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이 장기근속하게 되면서 상용직 직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려고 하자, 회사측은 10년만인 1996년에 상용직을 다시 6직급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원래 각 직급별로 9호봉이던 호봉 체계를 20호봉으로 확대하였다. 이러한 호봉범위의 확대는 도저히 여성들을 승진시키고 싶지 않다는 회사측의 입장 표명이나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여성노동자들이 승진할 수 없도록 상용직이라는 직제를 만들었지만 이 직제가 문제가 되자 상용직을 폐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그런데 상용직을 폐지하고 6직급으로 복귀하게 되면 장기근속에 의해 기존의 9호봉 체계를 넘어 12, 13호봉에 이르게 된 여성노동자들을 5직급으로 승진시켜야 하니까 기존의 9호봉 체계를 20호봉으로 확대한 것이다.
물론 당시 호봉범위의 확대는 모든 직급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협회에서 남성의 승진 연한은 길어야 4년 6개월을 넘지 않았다. 남성들 대부분은 한 직급에서 3-4년이 경과하면 승진이 되어 호봉도 각 직급에서 3, 4호봉이상 증가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즉 남성들은 기존 호봉체계였던 9호봉도 되기 전에 상위 직급으로 모두 승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들은 승진자체가 봉쇄되었던 상용직이 10년간 운영되는 동안 호봉승급만 되었으니 상용직 폐지 후 6급으로 복귀하더라도 기존 9호봉체계를 훨씬 뛰어 넘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런 여성노동자들을 6급에서 5급으로 승진시키지 않기 위한 조치가 바로 호봉단계 확대였던 것이다.
회사측의 이러한 조치가 '누구'를 대상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하였는지 너무나 명확하지 않은가? 의도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의 승진을 제한하기 위해 차별적인 제도를 운영했다는 것이 너무 가시적이어서 도대체가 감출 수가 없다. 여성노동자들은 또 다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10년 이상 장기근속 했던 여성노동자들은 그 동안 일한 경력에 대해 호봉산정만을 유일한 경력으로 인정받은 채 10년 전의 그 직급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그나마 승진체계가 있는 6직급으로 복귀되면서 승진의 가능성을 타진했건만 이번에는 호봉확대로 승진이 가로막힌 것이다.
변하지 않는 음계... 도도도도
이 여성노동자는 입사한 지 15년 만인 2000년에 6직급에서 5직급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승진한지 1년만인 2001년, 5직급 40세 정년으로 정년퇴직했다??
협회에는 직급별 정년제가 있었다. 5, 6급의 경우에는 40세, 4급 45세, 3급 50세, 2급 55세, 1급 60세로 각 직급에 해당되는 정년이 되면 당연 퇴직되는 것이다. 정년제의 연령차별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 사업장의 직급정년제는 성차별적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협회는 채용시 부당하게 여성만을 6직급으로 채용하였고, 그 6직급의 여성노동자들을 승진할 수 없도록 10년간 상용직에 묶어 두었다. 따라서 협회가 9호봉에서 20호봉으로 호봉 체계를 늘렸던 조치가 여성노동자만이 적용 받는 제도였던 것처럼 직급정년제 역시 여성노동자만이 그 제도의 수혜자(?)일 수밖에 없었다.
즉 남자들은 빠르면 3년, 늦어도 4년 내지 5년이면 상위 직급으로 승진한다. 남성들의 승진년한을 최대한으로 한다고 해도 5년이면 상위 직급으로 승진하므로, 5급으로 채용된 남성은 20년이면 최소 2직급에 속하게 된다. 협회의 남성노동자들은 1직급의 정년인 60세 혹은 2직급의 정년인 55세에 퇴직하게 된다. 반면 6직급으로 채용된 여성노동자들은 상용직에 10년을 묶여 있었고, 다시 6직급으로 복귀된 후에는 호봉이 확대되어 상위 직급인 5급으로 승진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여성노동자들은 6직급에서 5직급으로 승진하는데 평균 15년(많게는 20년)이 걸렸고 승진 후에는 바로 5직급의 40세 직급정년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여성노동자들은 40세에 퇴직하게 되므로 남성에 비해 20년 혹은 15년 먼저 정년 퇴직하게 된다.
협회에서 15년 이상 장기근속한 여성노동자들이 직급정년 당하는 5급은 협회의 신입사원 남성과 동일한 직급이었다. 협회 채용시의 부당한 성차별, 여성노동자 승진 기회를 차단하였던 상용직제 신설과 10년간의 운영, 여성노동자들의 평균 승진년한이 15년이라는 이러한 차별적인 제도 운영 결과 협회 설립이래 5직급 혹은 6급의 40세 조기정년은 여성근로자에 한해서만 적용되어 왔다. 이는 협회의 직급정년제가 성차별적인 제도였음을 명확히 드러내는 지표이다.
협회의 40세 직급정년의 성차별성과 그 직급정년이 상용직 신설 등 협회의 승진차별로 인한 것임을 주장한 것에 대해 행정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결하였다.
...상용직을 신설하고 직군 간 이동이 불허되었기 때문이지만 그 6직급이나 상용직이 사실상 모두 여성근로자로만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은 직제 개편은 사무보조원이라는 업무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어서 불합리하다 볼 수 없다...
낮은 직급에 여성을 채용한 것도, 부당하게 승진구조를 차단한 제도를 운용한 것도, 그래서 남성에 비해 15년 혹은 20년 조기 정년하게 된 것도 모두 '여성이 담당한 업무가 사무보조'이기 때문에 정당화된다. 회사는 남성의 경우 지방 근무를 해야하는 업무를 맡았다는 근거로 차별을 정당화했지만, 이 여성노동자는 평균 3년에 한번씩 순환 보직에 따라 연고가 없는 지방 근무까지 두루 거쳤으며, 과장이 파견 업무를 간 사이에는 과장 대행 업무를 했었다. 구체적으로 여성노동자들이 어떠한 업무를 수행하는가에 대한 판단은 뒤로 한 채, 여성이 담당하는 업무는 사무보조 업무라는 회사측의 근거 없는 주장에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어이없는 법원의 판결에 차라리 이 시대의 코미디를 축하하는 경배라도 들고 싶은 심정이다.
채용시의 성차별여부를 판단하기 앞서, 최하위직급의 여성이라면 그 업무가 사무보조업무일 거라고 당연히 믿고 있는 뿌리깊은 통념으로 인해 그런 판결이 나왔다고 본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 '여성의 일 사무보조업무'라는 편견 자체가 여성노동을 보조업무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 누구의 시각에서 '사무보조'라고 판단하는가? 여성노동의 업무내용과 가치를 따지기 전에 여성이 하는 일은 무조건 '사무보조'라고 규정한다. 여성노동자의 채용, 승진 차별을 판단할 때면 언제나 등장하는 말 중 하나가 여성의 일은 사무보조업무라는 것이다. 여성이 하는 일은 보조업무이기 때문에 낮은 직급에 배치되어도 승진이 되지 않아도 차별이 아니라고 주장해 온 역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여전히 미완성인 연주
여성노동의 역사에서 주요한 부분이 차별이고, 그 중심에 승진차별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단지 여성노동자의 노동의 역사가 차별의 역사였음을 현/재/ 인정해 달라는 것뿐이다. 여성노동자의 노동의 역사에 차별을 새겨 넣은 기업에게 차별의 인증을 되돌려 놓는 것이 현재 남겨진 몫이 아닐까? 여성노동의 차별의 역사를 차별로 인정하지 않는 현실을 바로 잡을 몫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그래서 2004년 가을에는 함께 연주하고 싶다. 이것이 차별이라고 좀 더 크게 말이다. 그것이 미완성의 곡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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