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삶나의일] 비스듬하게, 일-삶을 잡담함
비스듬하게, 일-삶을 잡담함
노 재 윤 : 여성노동센터 회원
나는 얼마 전까지, 우아하게 표현하면 편집기획자였다. 며칠 후엔, 처절하게 표현하면 출판관련 노역자가 될 예정인 백수다. 농익은 경력자도 아닌 것이 감히 말하자면, 대체로 편집자란 몇가지 숙련된 기술과 몇가지 감수성이 필요한 일이다. 그게 내 감성코드와 그럭저럭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또 뭐가 어떻게 바뀔지 알 수가 없다. 그 와중에, 그렇게 싫어하는 막연한 질문을 던지고 미끄러지길 반복한다. 내가 욕망하던 게 뭐였을까. 좋은 편집자나 기획자가 되는 것? 그저 어쩌다 보니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거 발을 잘못 담그고 있는 거 아냐? 혹시 난 다른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아무 재능이 없는 걸까. 당장 5년 후의 전망이 불투명한 만큼, 정답 없는 질문들이 나를 누른다. 말하자면, 대체 일과 삶과 내 감수성을 어떤 전망을 가지고 엮어가야 하는 걸까.
그러니까, 예비노동자인 내가 일과 삶을 연결시키는 오래 전 근심들 중 한가지는 이를테면 이런 거였다. 수컷들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지? 나는 매일같이 서바이벌 매뉴얼을 작성해야 할거라고 생각했다. 그 세계에 적당히 맞춰주며 발 담그는 방법, 등을 돌려 꼬질해진 발을 씻는 방법. 그런 거리두기 없이는 생산성 향상과 무관한 감수성이 0%대로 떨어지는 아저씨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겐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나가보니, 이를테면 내 '편하고도불편한' 섹스와 '딱히오갈데없는' 젠더가 바깥 세계와 맞물리며 충돌하는 상황 같은 건 쉽사리 벌어지지 않았다(다행히도!). 과민했다는 생각에 좀 멋쩍었지만, 그건 내 근심이 현실과 크게 달라서가 물론 아니다. 억압은 대개 전면적이거나 일률적이기보다는 교묘하게 뒤섞인데다, 내가 남성들이 만든 게임의 룰과 칙칙한 정서가 조직적으로 관철되는 노동현장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공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면 내가 알아서 잘 기었거나. 게다가 나의 근심이란, 몸으로 매뉴얼을 만들기도 전에 노동권을 근본적으로 박탈당하거나 노동하는 일상 자체가 비대하게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만큼 처절하지도 않다. 그러니 쓸데없는 엄살부리지 마. 살 수 있을까,를 넘어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먼저 생각하는 넌 그나마 행복한 줄 알도록 해,라며 나를 다독여야 했다.
이제 일-삶을 연결짓는 내 엄살은 이런 거다. 사회에 스스로를 내던지고 재사회화와 자가교육을 반복하면서 메커니즘을 알고 식견을 넓히는 것과, '사회생활'이라는 엉터리 개념으로 자위와 무마를 반복하는 일상을 구분해내고 능란히 줄타기를 할 수 있을까. 그닥 쉬운 일은 아니다. 매뉴얼은 약간 복잡해진다. 더불어, 유희하는 인간이 세상을 좀 덜 망치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나는 알차게 노는 일에 매진할 전망도 내야 하는데, 언젠간 일-삶-놀이의 느슨한 삼위일체를 만들어야 하는데, 세상에 역시 쉬운 일이 없다.
별다른 결심이나 가능성이나 변수가 없는 한, 다시 평균적인 노동력 투여와 자발적 착취가 한동안 반복될 삶을 예정하면서, 걍팍해질지 모르는 마음을 누르면서 다짐한다. '먹고 살기 바빠서'란 소리를 습관적으로 내뱉도록 강제하는 사회에서, 내 꿈처럼 일과 삶과 놀이가 50% 이상 일치하는 데다 세상을 덜 망치는 일에까지 자족적인 수준에서 힘이 되는, 진정 럭셔리한 삶은 흔하지 않나니, 당분간 일과 삶, 노동과 일상 사이에 비스듬하게 걸치면서 잘 놀고먹는 내용을 기획하자. 적당히, 또는 열심히를 오가며 일과 놀이를 병행하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아니, 사실 답같은 게 나올리 만무해. 그저 그땐 좀 더, 당신만큼은 용기가 생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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