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국에서] 기죽지마!!
기죽지마!!
손봉희 : 여성노동센터 상근활동가
연말이다. 연말이라고 정신없던 내 삶이 한꺼번에 정리되어 버리는 것도 아니건만, 그래도 연말이 되면 습관처럼 한해 동안의 나와 세상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쭉 살펴보니 전반적으로 끔찍한 사건, 사고가 많았던 한 해였는데, 그만큼 뉴스들도 대부분 우울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중 하반기에 속속 등장하며 내 흥미를 끌었던 뉴스들이 있는데 '여풍당당'이 바로 그것이다.
'캠퍼스 총학선거 여풍당당', '사시 합격자 여풍당당', '은행권 취업전선 여풍당당', '유통업계도 여풍당당' 등등. 전국 십여개의 대학에서 여학생이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단다. 이제 대학에서 여학생이 '정후보'가 되는 일은 더 이상 '특별할 것 없는' 일이라고 한다. 사시 2차 합격자 중에는 여성이 24.4%로 사상 최대라 한다. 또 국민은행과 기업은행의 하반기 신입행원 공채에서는 처음으로 여성합격자들이 남성보다 더 많았다며, '여풍이 사회 전반에 거세게 불고 있어서 경쟁에 밀린 남자들은 위기의 시대를 맞고 있다'고까지 호들갑을 떤다.
정말 '딸들의 유쾌한 질주'가 시작된 걸까? 이 기사들만 보면 세상이 변하고 있는 듯 싶다. 하지만 이 소식들에 어깨를 으쓱할 여성들보다는 기가 죽을 여성들이 더 많을 것 같다. 사회 속에서 체감하는 현실은 '여풍당당'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공이 되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대졸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평균 7번 정도 더 많은 입사원서를 내고도 취직하기가 힘들다. 어렵게 취직을 해도 대부분은 계약직이다. 공기업인 철도청만 봐도 알 수 있다. 새마을호 승무원을 뽑는데 남성은 정규직으로, 여성은 계약직으로 뽑았다. '여풍당당'이라는 국민은행과 기업은행의 뒤에는 30%가 넘는 비정규직 여성들이 있다. 그리고 불경기라거나 무슨 말못할(?) 사정만 생기면 여성 계약직 노동자들이 해고 대상 일 순위가 된다. 올해 초 새마을호 여승무원들의 계약해지 사건도 그랬다. 물론 이런저런 장벽을 다 뛰어넘고 정규직으로 입사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비전이 없다. '커피와 카피'는 여전히 여성의 일이고, 승진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정영임'씨는 정규직으로 입사해 15년을 넘게 일하면서 단 한번 승진했고 승진 1년 후 40세 직급정년으로 퇴직 당했다.
하긴 몇 개 대학에서 여학생이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고 공채에서 여성이 조금 더 많이 합격했다는 것이 '여풍'이 되고 '경쟁에 밀린 남자들의 위기'가 거론되는 것 자체가 여성들의 위치를 드러내는 반증인 셈이다. 그렇다고 마냥 기죽어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여풍당당'과 현실의 괴리에도 불구하고 미미하지만 변화의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문제는 이런 변화를 누가 주도하고 어떻게 확산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그 전략은 더 이상 '서강대 취업수첩'이 가르쳤던 '차별적인 문화와 관행에 대해 문제제기 하지 않고 도량을 넓혀 받아들이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철도청의 여승무원들처럼 성차별적인 채용과 해고에 맞서 싸우는 것, 정영임씨처럼 채용부터 퇴직까지의 누적된 차별에 대해 큰 목소리로 문제제기 하는 것이 바로 이 변화의 분위기를 대세로 만들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차별이 있는 곳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들이 표면으로 드러나고 '여풍당당'들과 만나 소통할 때 진정한 '딸들의 유쾌한 질주'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며칠 후면 2005년이 시작된다. 새해가 되면 고법에 계류 중인 '정영임씨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나올 것이다. 여성의 경험과 목소리를 인정하는 합리적인 판결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언론을 장식했던 '여풍당당'의 실체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꿔놓을 지도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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