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걸렸어] 신성일,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단상
신성일,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단상
한미라 : 여성노동센터 회원, 여성주의영어자료읽기위원회
한 남자를 사랑했었다. 그의 이름은 신성일!
<맨발의 청춘>(1964)에서 엄앵란과 함께 출연하며 내겐 너무 잘생긴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 <레테의 연가>(1987)에서 고뇌하는 지식인으로 분하며(그러나 진정 이런 놈들을 조심해야 한다.^^;) 딱 내 기호를 만족시켜줬던 그! 방송3사의 토크쇼를 점령한 엄앵란이 걸쭉한 입담으로 그의 엽색행각을 폭로하면서 그에 대한 나의 애정이 식을 즈음 <길소뜸>(1985)을 통해 추레한 잠바와 어눌한 말투로 다시금 연민을 느끼게 했던 그! 신성일에 대한 나의 애정은 이렇듯 질곡의 세월을 달려왔다.
그런 그가 몇 주 전 아침 토크쇼에 엄앵란과 함께 출연했다. 수업도 제낀 채, 신성일의 토크에 열중하던 중, 사회자가 신성일에게 엄앵란에 대해 고마운 점을 이야기해 달라고 주문했다. 신성일이 말하기를 "건강한 아이들을 낳아주어서 감사하다." 뒤이은 대형사고! "장애아가 있는 집에 가보면 집안이 얼마나 침울한지 몰라요. 건강한 아이들을 낳아 주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장애인에 대한 평소 신성일의 사고관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 사회 구성원의 가치관을 50% 정도는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장애인들을 철저히 타자화시키고 유령화시키는 한마디, "침울하다". 엄앵란에 대한 그의 감사가 아무리 애끊는 진정성을 확보하더라도 그의 감사는 정치적으로 옳지 못하다. 그의 감사의 근거는 타당하지 않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단상들! 우리 사회의, 혹은 내 안의 유령은 무엇일까? 있어도 있지 않은, 보여도 보려고 하지 않는, 철저히 비가시화된 '우리' 안에 들지 않는 존재들!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의 장애인? 이분법적인 이성애중심 사회에서의 동성애자?
임신 및 출산권 보장을 요구하는 장애인 여성과 이분법적 성적 구도를 반대하는 동성애자 여성이 각각 점하는 위치를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까? 여성학자인 쥬디스 버틀러 말 맞다나 타자를 포함하는 대명사 '우리We'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고 취약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오히려 전복적인 힘이 나올 수 있다. 그래, 우리We는 불확실하고 취약한 존재다. 엄청난 다름을 안고 있는, 같음이라곤 주변화된 존재들이라는 것 하나뿐! 그것을 인정하며 거기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조율하라는 얘기군. 그런데 평생을 페미니즘에 바친 학자의 대안치고는 너무 말장난 같잖아.
신성일은 나에게 너무 어려운 숙제를 안겨 주었다. 그가 서 있는 정치적 지점과 내가 서 있는 정치적 지점, 그리고 누군가가 서 있는 정치적 지점은 너무나도 다르다. 모래알처럼 흩어져있는 지점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호랑이의 제안에 나는 나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어떤 '떡'을 희생시키게 될까? 그리고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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