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재발 방지 조치가 인권침해인가? : 인권위, 세부정보공개제도 도입 자제 권고 결정에 부쳐
2005년 3월 2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청소년보호위원회(이하 청보위)가 의견을 요청한 <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개정안>에 대해 세부정보제공제도의 도입을 자제하고 수정, 보완할 것을 권고하였다. 인권위는 세부정보제공제도가 그 법적 성격이 실질적인 형벌로서 이미 범죄로 처벌받은 자에게 다시 실질적 형벌을 부과하는 결과가 되는 까닭에 이중처벌금지에 위배되고, 인격권 특히 사회적 인격상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하였다. 본 전국성폭력상담소/보호시설협의회는 이번 결정에 매우 깊은 유감을 표명하며, 이번 결정이 단지 한 사안을 넘어 국가인권위원회가 말하는 ‘인권’에 대한 개념이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요구를 담아내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국가인권위의 ‘인권’은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을 포함하고 있는가?
국가인권위가 말하는 ‘인권’이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를 말한다. (국가인권위원회법 2조 1항) 국가 또한 우리사회의 기본가치로서 이와 같은 인권의 존엄성을 명시해 왔다. 그러나 사회적 차별과 폭력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아직까지도 많이 존재한다. 특히 여성과 장애인, 청소년, 동성애자 등 특정집단에 대한 오랜 차별의 결과 이들 집단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문화적으로 당연시되고, 정당화되는 문제들은 오랫동안 지적되어왔던 인권문제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인권에 대한 원칙적 당위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이와 같은 인권의 보장과 실현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일례로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성에 대한 차별적 가치와 문화 속에서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는 우리사회의 심각한 인권문제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부당한 성적 폭력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침해당한 권리에 대해 말함과 동시에 오히려 의심받고, 비난받게 되는 상황들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오히려 피해자의 피해사실을 밝히겠다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할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적 맥락을 고려할 때, 청소년보호위원회에서 발의한 이번 <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볍률 개정안>은 성범죄 예방의 책임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있음을 명확하게 하고, 청소년 성범죄자의 재발방지를 위해 국가차원의 노력을 하겠다는 점을 명시한 의미있는 시도라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인권위가 모두에게 인권이 있다는 말을 원론적으로 반복하며 성폭력 범죄로부터 최소한의 방어권조차 가해자의 인권침해‘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도입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는 사실은 인권위의 인권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의문을 갖게 만드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소년 성범죄의 심각성에 대한 감수성을 결여한 인권위
성폭력피해자의 인권현실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이해결여는 비단 이번 결정뿐만이 아니라 이미 지난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제작한 인권영화 <여섯개의 시선>을 통해 문제제기 된 바 있다. 우리사회의 차별적 폭력과 인권침해 문제를 주제로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 제작한 옴니버스 영화 <여섯개의 시선>에서, 인권위는 그중 마지막 주제로서 ‘가해자의 인권’을 다룬바 있다. 이에 대해 여성단체에서는, 인권위원회의 인권 감수성과 기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가해자라 하더라도 보장받아야 할 인권이 있다. 그러나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 가해자의 행위와 관련된 법적, 사회적 책임을 묻는 부분에 대해 ‘가해자 역시 인권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피해자의 권리를 침해한 가해자의 행위에 대한 법적,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 자체를 봉쇄하는 효과를 가질 우려가 있다.
가해자 인권에 대한 사회적 우려와 담론들은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여성에 대한 사회문화적 차별과 편견 그리고 폭력 속에서 피해자의 권리 보장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성폭력 문제 영역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가해자의 인권에 대한 우려의 담론들이 애초의 의도와 무관하게 또 다른 방식으로 성별권력화되고, 현실의 권력적 불평등과 폭력을 재생산하는데 기여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사회의 차별적 문화와 폭력 속에 놓여 있는 집단의 인권보호를 위해 노력해야 할 인권위가 성폭력피해자의 권리보장과 실현에 대한 적극적 노력 이전에, 가해자의 인권 보호를 고민하고 주장한다는 것은, 인권위가 성폭력피해자의 인권현실에 얼마나 무지한가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며, 인권위의 존립 필요와 그 의미에 대해 회의하게 만든다.
피해자를 위한 재발방지 조치가 이중처벌, 과잉금지, 인권침해인가?
또한 이번 인권위의 결정 핵심이었던 이중처벌금지와 과잉금지에 어긋나 인권침해여지가 있다는 주장은 이번 인권위 결정의 핵심이었다. 이는 이번 세부정보공개제도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세부정보공개제도의 경우 기존 신상공개제도가 국민계도에 목적을 두어 인권침해적 요소가 있었던 것에 비해, 청소년 대상의 성폭력 범죄의 예방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여 공개의 대상이 되는 범죄를 축소하고 전과요건을 추가하여 신상공개의 범위를 엄격하게 하였다. 또한 공개되는 신상정보를 부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적인 정보의 악용금지 조항을 두고 있다. 이것은 현 개정안이 잠재적 피해자 및 지역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지역사회에의 통지’를 주내용으로 하는 제도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하며, 기존에 문제되었던 성범죄자의 기본권침해 여지를 더욱 축소하여 인권보호라는 관점에서 오히려 진일보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세부정보공개제도가 사진까지 공개하는 강력한 제도로써 기존의 제도보다 인권침해 여지가 더 커졌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공개의 방식이 지역주민에 한정된 개별열람으로 바뀌고 공개대상자의 선정도 더 엄격해졌다는 것을 간과한 주장이다. 구체화된 입법목적, 범죄예방효과의 제고, 공개대상자의 기본권침해 여지의 최소화 등을 고려할 때 세부정보공개제도는 과잉금지 원칙을 위배하였다고 볼 수 없으며 공개대상자의 인격권 및 사생활의 비밀의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할 수 없다.
이중처벌이 아니냐는 지적도 마찬가지이다. 이 제도는 성폭력 범죄의 예방을 입법목적으로 분명히 천명하고 대상자의 선정 및 공개대상정보, 공개의 지역적․인적 범위 등을 결정하는데 있어 성폭력 범죄 예방을 위한 제도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어, 공개대상자가 혹시라도 입게 될 수치나 불명예는 지난 2003년 기존의 신상공개제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합헌의견이 언급한 바와 같이 신상공개제도가 추구하는 입법목적에 부수적인 것일 뿐이어서 위 제도를 형벌의 일종이라고 볼 여지는 훨씬 줄어들었다. 또한 지역주민에 한정된 개별열람의 공개방식과 정보의 악용금지 조항 등을 고려하면 과연 이러한 방식의 정보공개가 공개대상자에게 형벌이라고 할 정도의 권리침해를 가져올 것인지도 의문이다.
피해자 인권은 어디로 가는가
인권침해‘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가해자의 인권을 보호한 인권위는 인권침해사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성범죄 현실과 피해자 인권에 대해 대체 어떤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지 되묻고 싶다. 또한 이번 인권위 상임위원 전원의 결정과정에서 여성위원 4명은 재발방지를 위한 본 조치에 찬성하고 남성위원 6명은 가해자 인권침해소지를 고려한 결정을 내린 것도 주목할만하다. 우리는 앞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차별과 폭력 문제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의 비율을 5:5로 구성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인권위가 인권침해를 받고 있는 성범죄 피해 여성에 대한 적극적 조치와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가해자에 대한 인권침해‘소지’를 인권침해로 판단한 것이야말로 ‘과잉’이었으며, 피해자에 대한 ‘이중’피해라는 점을 지적하는 바이다.
2005년 3월 3일
전국 성폭력상담소․피해자보호시설 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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