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머프의 영화관 ] 그 남자만을 위한 윤리 : 《박쥐》
처음 영화 <박쥐>를 보았을 때 나의 감정은 만족스러움이었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감각적인 화면도 물론이거니와,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뒤틀린 유머도 마음에 들었다. 특히 한 평론가가 ‘인간을 극단적으로 냉소적으로 바라보
는 인성이 덜 된 작가’라며 이 영화에 0점을 주었을 때도 그랬다. 사실 우리가 박찬욱의 영화를 보았던 것은 그런 이
유 때문이 아닌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채 미로를 헤매는 작은 인간들을 보기 위해, 혹은 원하는 바는 이
루었으나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한 아이러니를 보기 위해.
하지만 이 같은 만족감은 시간이 지나 다시 영화를 마주했을 때 다른 감정으로 변했다. 그것은 이 영화가 주인공인
‘상현’을 다루는 방식 때문이었다. 물론 그 역시도, 박찬욱 감독이 줄곧 다뤄온 아이러니한 비극을 겪는다는 점에선
똑같다. 하지만 그는 그 속에서 비참해지지도 혹은 원하는 바를 성취하지 못한채로 남아있지 않는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로서 그는 결국 죽음을 선택하고 죽음을 통해 자신의 윤리를 달성한다. 말하자면 상현의 마지막은 너무나도 고
결하다.
사실 이 영화가 단지 이런 이야기였다면,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찝찝해 할 이유는 없다. 나는 사람에 대해 냉소적인
영화 만큼이나, 인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영화도 좋아한다. 문제는 영화가 상현의 윤리와 고결함을 드러내는 방
식이다. 이 영화에는 또 다른 주요 캐릭터 ‘태주’가 등장한다. 그녀는 그야말로 모든 점에서 상현의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이라 할만하다. 태주의 삶은 권태와 좌절된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러한 욕망을 성취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으며 또한 죄책감도 가지지 않는다. 중간에 그녀는 자신이 죽인 남편의 환영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뱀파이어가 된 이후로는 이마저도 사라진다.
나는 이 지점에서, 선악과 우화에서 부터 이어져온 고루한 여성과 남성에 대한 서사를 이 영화가 답습하고 있는건 아
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유혹하는 여성과 여기에 걸려든 순진한 남성(아닌게 아니라 상현이 태주의 남편을 죽인 것은,
그가 그녀를 학대하고 있다는 태주의 거짓말 때문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으로 죄를 저지르는 여성과 그를 만류
하는 남성. 이런 식의 구도에서 여성은 ‘자연, 본성, 몸’의 위치를, 남성은 ‘이성, 합리, 윤리’의 위치를 차지한다. 태주가
폭주를 반복하고 상현이 고뇌를 거듭할 수록 이런 대치는 더욱 강렬해진다. 피를 위해 사람을 죽여선 안된다는 상현의
말에 태주는 인상적인 대사를 던진다.
‘여우가 닭 잡아 먹는게 죄냐?’
물론 이렇게 확립된 상현의 그 윤리라는 것은 사실상 위선적인 것에 가깝다. 상현의 원칙은 그의 필요에 의해서 언제
든 깨지기를 반복한다. 가령 태주가 뱀파이어가 된 과정을 살펴보자. 우발적으로 태주를 살인한 그는 아들의 죽음으로
중풍이 온 라여사의 시선을 마주한다. 그 시선을 홀로 마주 해야하는 공포 앞에서, 상현은 다급하게 태주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살려낸다. 말하자면 태주는 자신의 죄를 함께 공유하고, 라여사의 시선으로 상징되는 책임의 공포를 함께해야
할 존재다. 그에겐 그녀가 필요하다. 때문에 불살을 원칙으로 하던 그는 태주가 시름시름 앓게되자 사실상 산 제물을
그녀에게 가져다 바친다.
다른 사람(주로 여성)에게 자신의 윤리를 강요하지만, 정작 자신이 다급한 순간에는 그 모든 원칙을 어겨 버리는 사람
(주로 남성), 우리는 이런 식의 이야기를 현실에서 무수하게 마주하곤 한다. 당장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각종 조직 내
성폭력 문제를 보라. 각 집단들이 내걸었던 허울 좋은 대의와 원칙들이 과연 그런 사건들 앞에서 잘 지켜진 적이 있는
가. 대부분의 경우 집단의 존립에 위험이 된다는 이유로, 대외적인 명성에 금이 갈 것이란 이유로, 때문에 조직이 수행
해야 할 너무나 중요한 일에 방해(?)가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그 사건들은 소리소문 없이 묻히길 반복한다.
물론 영화는 상현의 이러한 면모들을 누락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실체만큼 상현은 추악해지지 않는다. 어쨌든 상현
은 뚜벅뚜벅 자신의 윤리를 실현하기 위해 걸어 나선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죽음으로서, 다른 사람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자기 스스로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물론 혼자 죽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이 뱀파이어로 만든
태주도 억지로 이 과정에 동참시킨다. 그리고 나는 그 장면에서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에게 태주는 무엇이었을까. 자
신이 지은 죄? 자기가 매듭지어야 할 책임? 그럴거면 애초에 왜 태주를 뱀파이어로 만들었을까? 자기가 필요할 땐
붙들다가, 또 다른 필요가 생길 때는 없애버려도 괜찮은 대상? 영화를 보던 나는 생각했다. ‘미친놈, 죽으려면 혼자
죽지’
결국 태주는 상현의 고독을 위해 뱀파이어가 되었다가, 그의 도덕적 결단을 위해 재가 된다. 상현은 태주에게 지옥에서
만나자고 말하지만, 태주는 그에게 자신은 지옥을 믿지 않는다며 상현이 말하는 윤리가 오직 그만의 것임을 명징하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영화는 불타버린 태주의 발에서 툭 떨어지는 상현의 구두를 비춘다. 애초에 태주의 것도 아니었
고, 발에도 맞지 않던 신발. 내가 이 장면에서 느껴진 감정은 쓸쓸함이었다. 하지만 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신발을 보
며 내가 느껴야 할 감정이 안타까움이나 쓸쓸함이어야 할지. 이 영화는 분명 필요한 이야기는 모두 했다. 하지만 나는
영화가 그 이야기를 공평한 방식으로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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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스머프
민우회 회원. 안 그런척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새침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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