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바톤터치] 귤나무의 "오래전 그날의 술자리로 돌아가게 된다면"
[여성주의 바톤터치] 귤나무의 "오래전 그날의 술자리로 돌아가게 된다면"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동아리 활동이 끝난 후 늦은 밤 술집에서 뒤풀이가 시작되었다.
술자리는 늘 그렇듯 흥성흥성하던 초반부를 지나 시든 배춧잎처럼 축 늘어진 분위기의 후반부로 이어졌다.
테이블 한쪽엔 감기는 눈꺼풀을 간신히 홉뜬 사람, 한쪽엔 아예 엎어져 자는 사람,
한쪽엔 아직 고갈되지 않은 에너지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는 꼭 남아있던 당시의 이상한 습관 탓에
피로함과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그러면서 웃고 떠드는 무리에 동참했다가, 혼자 멍하니 생각하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말하기도 귀찮은 상태가 되어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몹시 피로했으나 술을 마시지 않은 덕에 의식은 명료했다.
왜 술자리는 이다지도 재미가 없는 것일까, 재미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재미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재미있는 술자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냥 닥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등등의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그날의 술자리에서 재미있는 순간이 한순간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느 때처럼 친한 선배들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누군가의 재미난 이야기에 박장대소를 터뜨리기도 했던 것 같다.
특별히 좋지 않은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괜찮은 술자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다 싫었다.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도저히 좋을 수가 없었다.
나란 존재도 끔찍하고, 사람들도 끔찍하고, 이 세계 자체도 정말이지 끔찍했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그냥 다 싫었다. 싫다, 싫어!
나는 갑자기 술자리를 뒤집어엎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나의 진실을 말해주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나의 진실이란 게 뭔지, 그런 게 있기는 있는 건지 나조차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어떤 진실을 외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모든 걸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아, 허튼짓 다 집어치우고 들어보라고!
나는 나를 까뒤집어 사람들 앞에 보여주고 싶었다. 뭔가를 이해받고 싶기도 하고, 부정당하고 싶기도 했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벌써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창피하기도 하고,
무슨 일 있느냐는 걱정을 받을 것이 부담스럽기도 해서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 문고리를 잠그자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왜 우는지 나 자신도 잘 설명할 수 없지만, 무척 서러운 기분이었다. 눈물은 꽤 오랫동안 흘러내렸다.
나중에는 이왕 운 김에 확 울어버리자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나를 더 슬픈 감정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한동안 울던 나는 겨우 울음이 가라앉자 눈물 자국을 닦고 다시 술자리로 돌아갔다.
그날의 일은 내게 특기할만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눈물의 원인은 스스로도 찾기가 힘들었다. 호르몬의 농간, 운동 부족, 성격 파탄, 인정투쟁…?
물론 그 자리에는 과거 내게 다양한 방식으로 모욕감을 안겨줬던 이들이 있었다.
‘중요하고 심각한 일’에 관한 대화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이 여성을 배려하는 것이라 착각하던 남성,
여성이 착취당하는 문제에서조차 여성의 목소리를 가로막고 맨스플레인을 시전하던 남성,
지인, 포르노 주인공, 연예인, 정치인 등 대상을 불문하고 여성이라면 무조건 외모 품평을 일삼던 남성…
내가 그들로 인해 모욕감을 느낀 순간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게 문제였다.
외부에서 행해지는 폭력이 미묘하고 우회적일수록 적절한 때에 적절한 대응을 하기 힘들어지고,
그렇게 넘어가는 순간들이 반복되다 보면 축적된 분노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자신을 덮쳐오게 된다.
그건 명확한 원인을 밝혀내기 어려운 탓에 더욱더 견디기 힘든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실패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생각이다.
만약 시간을 거슬러 오래전 그날의 술자리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래서 혹시 누군가 내게 왜 우느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내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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