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나는 다방] 숲 속의 이산
얼마 전 사무실에서 오랜만에 이산을 봤다. 어찌나 반갑던지 덩실덩실 춤을 췄다.
그렇게 반가울 줄은 나도 몰랐다. 이산이 많이 궁금했다는 걸 그날 알았다.
이산은 배우다.
인터뷰를 앞두고 이산의 공연을 보러갔었다.
까페에서 하는 2인극 공연이었다.
프랑스 작가 장 주네의 1947년 작 <하녀들>을 이산이 각색하고 연기도 했다.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1937년 프랑스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각색해서 만든 연극이라고 한다.
일주일 뒤 이산을 다시 만났을 때, 연극 이야기부터 꺼냈다. 사실 그 연극은 정말 좋았다.
밑줄 그으며 들은 대사가 있었는데. 뭐지? 몸이 원래 작았는데 이제는 크고 뭐 그런 거 였는데….
"난 이제 뭐든지 자신 있어요. 도대체 누가 내 입을 막을 수 있겠어요?
감히 누가 날 '얘야' 하고 부를 수 있겠어요?
난 시중을 들었어요. 시중을 드는데 알맞은 몸짓을 했어요. 난 마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난 내 몸을 굽혔어요. 침대를 정리하느라, 유리창을 닦느라, 야채를 다듬느라, 문에서 엿듣느라,
열쇠 구멍에 눈을 갖다 대느라 내 몸을 굽혔어요.
하지만 이제 난 내 몸을 똑바로 세워요. 꼿꼿하게 세워요.
난 목을 졸라 죽인 살인자예요."
맞다. 바로 그 대사.
난 배우를 만난 것이다.
(사실 그날 이산이 다시 읊어준 대사도 기억이 안 나 검색해서 긁어 붙였다.)
이산의 연극을 보면서 ‘배우인 순간’의 느낌이 궁금했다.
사람들이 코앞에 앉아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는데,
그 많은 시선들 앞에서 감정에 집중해 있을 수 있다니 신기했다.
시선 앞에 놓이면 자기 자신인 채로 있기도 어렵지 않나?
시선이 의식되지 않을 정도로 배역에 몰입한다는 건 어떤 경험일까?
굿이라도 한 것처럼 개운한 걸까?
"공연하면서도 그게 오락가락하는데. 시선이 느껴지는 순간도 있거든.
내가 몰입을 놓치는 순간이 많으면
관객들도 연극에 몰입을 못하게 되는 것 같긴 해.
근데, 개운함은… 그건 잘 모르겠다.
운동 한판 잘하고 나서 개운하다. 이런 건 있는데(웃음).
공연 내내 그 정도 발성을 유지하면서 몸을 의도대로 계속 쓰려면
평소에는 안 쓰는 속 근육, 잔 근육들 다 잘 쓰고 있어야 되거든.
그래서 온 몸을 다 한번 쓴 것 같은 그런 개운함은 있지."
그래, 기억났다. 이산은 이런 사람이다. 추상적인 질문에 실용적인 대답을 하는 사람.
그 실용성 아래에 비치는, 단지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듯한 간단함과 단단함.
이산과 함께 간 곳은 보라매공원 뒷산의 숲 속이었다.
그곳에서 매주 화요일 오전에 한국무용 수업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산이 활동하고 있는 극단의 연습실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더니
연습실 없는 극단이라며 이곳에 나를 초대했다. 오는 김에 수업도 같이 듣잖다.
수업은 이런 것이었다.
한 팔을 뻗는다. 무한한 공간 속에 하나의 방향이 시작된다.
다른 팔도 움직인다. 몸의 느낌에 의지해 최초의 방향과 나란한 자리를 찾아 팔을 두고
그에 어울리게 자세를 만든다.
‘기울기’가 완성된다.
사진은 이산이 만든 기울기이다. 신기하게도 기울기가 완성되면 몸이 아주 편안하다.
선생님은 춤은 몸의 자연스러운 자세를 찾아내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 외에도 서서히 직립하기, 혀와 내장의 긴장 풀기, 악기 없이 박수로 하는 즉흥 합주를 했다.
평범한 평일 아침, 숲 속에서 맨 발로 이런 일들을 했다.
이산은 평소에 이런 걸 하며 살고 있구나.
좋겠다.
“공연 분야 중에서도 배우를 택한 건.
몸을 통제하는 쾌감을 느낄 수 있어서…. 그래, 그게 컸던 것 같아.
사실 내가 배우하고 있다고 그러면 다들 응? 왜? (웃음)
차라리 연출이 어울린다며.
근데 연기 워크샵에서 발성이나 호흡, 근육을 쓰는 방법 같은 것들
배우면서, 몸을 훈련해서 점점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어가는 게,
쾌감이 컸거든.”
직업을 바꾼 이유치고는 말초적이라 기분이 좋았다.
대의, 까지는 아니어도 전망, 아니면 정체성, 정도는 숙고하며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시대가 요구하는 삶의 기술.
하지만 얼핏 보면 사소한 이유로,
그 사소한 이유가 나중에 어떤 심오한 동기로 밝혀지든 말든 상관없이 사소한 채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이 더 기분이 좋다.
그런 식의 선택에서는 한 번의 선택으로 삶이 다 결정되거나
심지어 훼손될 수도 있을 꺼라는 불안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근데 이산, 돈은?
“처음에는 직업은 배우라고 하면서 돈은 과외나 알바로 벌고.
근데 한 4년차쯤 되니까 일이랑 생계랑 간격이 조금씩 좁혀지는 것 같아.
알바를 해도 그냥 과외나 까페 알바가 아니라
아마추어 배우들 연기지도를 하는 식으로.
이러다가 좀 더 경력이 쌓이면 상업적인 연극도 하고.
소극장에서 만석 되는 공연이면 월 100만원 정도 보장되니까.
그러면서 시간을 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공연 만들고 그러지.
돈이랑은 거리가 먼 직업인데
난 그냥 그때그때 한번 해볼까 싶은 게 있으면
다른 걸 생각을 잘 안하니까(웃음).”
생각해보면 이산은 원래 그랬다.
총여학생회 선거 출마라는 나름 엄청난 권유를 했던 그날 밤에도
그래? 한번 해보지 뭐
나 민우회 활동가가 됐으니 넌 회원 하라고 살랑거렸던 그 날도
응, 할께.
얘기 들어보니 <하녀들>도 그렇게 시작했다.
“올해는 극단이 내부 정비를 하는 시기라서 공연을 쉬거든.
그러다보니까 내 직업이 뭔지 헷갈리는 지경이 된거야.
그러고 있는데 마침 그 까페 매니저가 아는 사람이라
까페에서 기획하는 연극제 이야기를 들은거지.
그래서 <하녀들>을 해보기로 했는데.
극단 같이했던 친구랑 둘이 뭉쳐서
연습실 대여비가 없으니까 공원에서 연습하고, 걔네 집에서도 연습하고,
아는 선생님이 공연 준비하신다는 소문 듣고
그럼 연습실 있겠다며 찾아가서 거기 빌 때 얻어 쓰고, 소품은 다 각자 집에서 가져 왔고.
그래서 정말 최소 비용으로 5만원이 들었는데,
그 까페에서 입장료의 반을 우리한테 공연비로 줬거든.
그게 6만원이었어. 만원 남았지!!(웃음)
보통 공연 같이 하는 사람이 10명 정도가 되면,
각자 한 10만원 정도 내면 공연하고 뒷풀이까지 할 수 있거든,
근데 어떤 때는 공연하고 뒷풀이까지 하고 몇 일 있다가
만5천원쯤 더 입 금해야 될 때도 있는데, 그럴 땐 정말 짜증나거든(웃음).”
그러니까 이산은
생계를 재생산하는 직업이 아닌
즐거움을 재생산하는 직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였다.
“이렇게 한번 해보니까, 아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연습실 없어도, 소품비 없어도!
지금은 프린지에 올릴 3인극 준비하고 있는데,
작년에 민우회에서 낙태를 주제로 ‘끓는다, 미역국’ 공연을 했었잖아.
그때 참가자들이랑 연습하면서 나눴던 경험들이 인상적이어서,
그 주제로 연극을 한번 만들어 볼까.
아…그거 극본 써야 되는데!
난 주말동안 내가 조금은 쓸 줄 알았는데, 한 줄도 안 쓰더라고. 흐흐.”
그리하여 이산이 이번 주말에는 극본을 썼다면
올해 프린지 페스티벌에서도 이산의 연극이 공연될 예정이다.
난 또 보러가야지.
*이산의 극단인 <목요일 오후 한시>에 대한 설명은
아래 링크의 인터뷰에 자세히 나와 있길래 생략.
이산은 2년 전에도 탐나는 다방에 초대되었더라고요.
겹치기 출연이라 손가락질 마오.
사무처 활동 시작한지 얼마 안되서 아는 회원이 별로 없...쿨럭...
http://www.womenlink.or.kr/nxprg/board.php?ao=view&bbs_id=moram_good&page=&doc_num=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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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본적은 없지만, 멋지게 사는 사람!!! 후기 잘 봤어요^^
이산이 극복썼는지 엄청엄청 궁금하다! 보고싶다 꺅
프린지 공연 같이 보러가는 것에 관심있음~~같이 가자요~!!
이산님의 하녀들 어땠을까, 궁금하다. 좋아하는 작품인데. 프린지 공연하시면(주말에 극본을 쓰셨다면?ㅋ) 관심있는 민우회사람들 같이 보러가자요ㅎ
이산이 만든 기울기 멋진데요? 뭔가 멋져보여!!
이산이다아아아 ㅎㅎ
와 배우 이산! 이산 덕분에 연기 데뷔 어렵지 않았어요(거창) ㅋㅋㅋ
이렇게 보니 또 새롭다~
연극배우라니 멋져요~ 몸을 자유롭게 쓴다는 거 부러워요
이산의 프린지 페스티발 연극이 기다려집니다아아--
먼 옛날 학교 극단에서 을 봤는데, 좀 이해가 안됐었어.
희번뜩한 눈빛, 지나치게 강조된 어조. 하지만 스토리가 가진 매력이 있지.
그래서 이산의 궁금하다. 아직도 하려나? 프린지에서 할 것도 관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