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의 <성범죄예방가이드>로는 성범죄 예방 안된다
지난 7월 초에 경찰청은「여름철 성범죄 예방가이드」를 제작ㆍ배포했지요.
이 예방가이드는
‘지나치게 노출이 심한 옷은 성범죄의 원인’, ‘야간ㆍ심야 시간대에 외출을 삼갈 것’, ‘술자리는 가급적 일찍 끝내고 귀가할 것’ 등의 조항을 갖추고
피해자의 몸가짐이 성범죄의 원인인 것처럼 말하고 있답니다.
유독 성폭력에 있어서 만은 가해자에게 수용적이고 피해자는 의심부터 하는 ‘피해자유발론’이 횡행하는 한국사회에서,
성범죄의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고 예방해 나가야할 수사기관이 오히려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심지어 ‘예방가이드’라는 이름으로 배포하다니.
이 어이없는 사태에 대해 언론과 여성단체들은 가이드라인이 배포되었던 7월 초부터 이를 지적하고 배포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확인 결과, 이 예방가이드는 일선 경찰서 민원실에 여전히 비치, 배포 중이더군요.
민우회 성폭력 상담소에서는 성폭력에 대한 이해부족(무관심?)과 그로 인해 통념을 반복하는 예방가이드를 배포하게 된 것이 얼마나 공익에 역행하는 행동인지, 이 예방가이드를 제작했던 담당자들이 하루 빨리 깨달아야 할 텐데…라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담아 경찰청에 이 예방가이드의 배포 중단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습니다. 아래는 의견서 일부입니다.
경찰청에서 발간하는 범죄 예방가이드는 국민 개개인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 즉 자위방법체제를 갖추는 데에 필요한 조언들을 제시하기 위해 제작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범죄 예방가이드 역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접근하여 잠재적 피해자로서의 여성이 조심해야할 점들을 부각시킨 위와 같은 항목들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성범죄의 특성을 면밀히 파악하다보면, 잠재적 피해자의 예방을 중요시 하는 예방책은 오히려 성범죄를 지속시키는 잘못된 성인식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뿐, 예방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절도 등의 범죄가 일어났을 때, 피해자가 설령 지갑을 허술하게 관리했다고 하더라도, 범죄의 책임이나 원인을 피해자가 제공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피해자는 단지 권리를 침해받은 사람이며, 잘못한 것은 가해자이므로 당당하게 자기 권리를 회복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범죄의 경우 피해 자체를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서 피해자를 위축시키거나 오히려 피해자가 성범죄의 표적이 되게끔 행동했다면서 사건과 상관없는 피해자의 외모나 생활습관 등을 비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밀양 성폭력 사건 조사 당시 수사관이 피해 학생들에게 했던
'너희들 밀양에는 뭐하러 갔노, 대가리 피도 안 마른 년들이 남자 꼬시러 밀양으로 가느냐. 내 고향이 밀양인데 너희들이 밀양 물 다 흐려 놨다. 밀양을 이끌어갈 애들이 다 잡혀 왔는데 이제 어떻게 할꺼냐',
'내 딸이 너희처럼 될까봐 겁난다'
라는 발언 역시 성범죄에 대한 ‘피해자유발론’이 2차 피해를 낳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왜곡된 인식이 만연한 상황에서 ‘성범죄의 원인이 여성의 몸가짐’이라고 선전하는 예방가이드를 배포한다면, 피해의 책임을 오히려 피해자에게 돌리는 성범죄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더 강화하는 효과를 낳을 것입니다.
또한, 지적된 항목 중 특히‘여성들의 노출이 성범죄의 원인’이라는 힝목에는 남성들은 노출이 많은 옷차림을 보면 충동이 생기며 그 충동은 참을 수 없는 것이므로 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즉 성폭력을 본능의 문제로 파악했을 때 이런 판단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폭력 가해자를 연구하고 가해자 치료 및 교정 프로그램을 개발한 연구자들은 욕구 자체보다는 그 욕구를 폭력적으로 표출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사고 체계가 문제의 원인이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성행위를 있을 수 있는 일, 남자라면 그럴 수 있는 일로 생각하는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성범죄의 가장 큰 원인인 것입니다.
잘못된 인식이 범죄를 양산한 대표적인 예로 최연희 의원이 성추행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최의원은 성추행을 저질러 놓고 '술집 주인인 줄 알았다'고 변명했는데, 이는 술집 주인의 몸은 침해해도 된다는 가해자의 잘못된 인식이 범죄로 이어진 상황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실효성 있는 예방책은 누구의 몸이든 침해하면 범죄라는 올바른 인식을 사회적으로 확산하는 것입니다. 본 단체 역시 다년간 성범죄 가해자 교육을 진행해오면서 가해자의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무엇보다 중요한 성범죄의 원인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성의 노출이 성범죄의 원인’이라는 예방가이드는 성범죄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 판단됩니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진단은 결과적으로 성폭력 문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유포하므로 조속히 시정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가해자들이 피해자가 범행동기를 제공했다며 자신의 범죄행위를 변명합니다. 그리고 일선 수사과정은 이런 가해자들의 변명을 가장 가까이 접하게 되는 곳이니만큼, 수사기관에서는 성폭력의 원인을 가해자의 입장에서 파악하기 쉬우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한 언론보도에서 경찰청 관계자가 「여름철 성범죄 예방가이드」에 대한 지적에 대해 "여성의 노출 의상에 대한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현장에서 성범죄자를 조사해 보면 공통적으로 옷차림에 관한 진술이 나오는 것이 현실" 이라고 해명한 바 있습니다. (부산일보 07.08.01. <지나친 노출·밤길 외출 = 성범죄 표적? 시대 뒤떨어진 경찰청> )
그러나 가해자의 입장에서 파악된 범죄의 원인은 자기 잘못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가해자들의 자기방어 심리의 발현일 뿐입니다. 성범죄를 근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공공기관에서 이런 가해자의 자기방어 심리를 검토 없이 수용하여 범죄의 원인으로 알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본 단체는 귀 기관에서 제작한 「여름철 성범죄 예방가이드」가 실효성 있는 예방책이 아니며, 오히려 성범죄를 가능하게 하는 가해자들의 잘못된 성인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방가이드로 배포되기에 매우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야한다는 수사기관의 공적 역할을 생각해 보았을 때 시급히 시정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이드라인이 배포되었던 7월 초부터 언론과 시민단체에서 위와 같은 의견을 지속적으로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선 경찰서 민원실에는 이 예방가이드가 여전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귀 기관에서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성범죄 근절을 위한 노고를 아끼지 않는 만큼, 부적절한 예방가이드 배포 건에 이제라도 조속한 시정조취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일선 경찰서 및 공공기관에 배포된 「여름철 성범죄 예방가이드」를 즉시 회수 또는 폐기하고, 미 배포된 가이드는 폐기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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