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최근의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성폭력 대책들에 관한 논평
<논평>
최근의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성폭력 대책들에 관한 논평
연일 보도되는 성폭력 사건과 더불어 ‘대책안’들이 물밀듯이 쏟아지고 있다. 본 상담소에도 성폭력 사건의 발생원인이나 해결방안에 관한 의견을 묻는 전화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성 범죄에 성난 여론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된 최근의 ‘대책안’들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그 하나는 전자 팔찌, 치료 감호제, 사형 선고, 성범죄자 신상공개, 성범죄자 데이터베이스 구축 등과 같은 ‘사후 법적 장치’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전자태그부착, GPS장착 의무화 등과 같이 ‘잠재적 피해자에 대한 적극 보호 조치’ 방안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대책논의는 1) 법적 처벌 강화만이 성폭력을 막는 근본 대책이 될 수 없다는 점 2) 피해자에 대한 보호 조치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 3) 실질적으로 필요한 성교육 정책이나 사회의 성 인식 및 문화개선에 관한 논의를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한다.
이제껏 성폭력에 관한 법적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성폭력이 끊임없이 발생해온 것은 아니다.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기준은 존재하는 데도 성폭력으로 인정되지 않는 현실,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더욱 관대한 사회 전반의 태도 등의 사회문화적인 구조 속에서 성폭력 가해자가 양산되고 성폭력 피해가 발생되어져 왔다. 그러나 ‘성폭력’에 대한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는 성폭력 가해가 마치 ‘통제 불가능한 병’때문에 발생하는 것인 양, 법적 조치만 강화하면 능사일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익명의 괴한에 의해 벌어지는 ‘납치강간’과 같은 성범죄에는 격렬히 분노하지만, 친족에 의한 성폭력이나 데이트 강간 등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는지 혹은 진짜 성폭력이 맞는지 의심하는 이중적인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성폭력 예방법이라며 ‘밤길 다니지 않기’등의‘조심하기’를 강요하는 사회의 태도는 피해자들에게 성폭력 발생의 책임을 전가하고, 일상생활을 위축 시킨다. 결국 언급된 대책들의 종착점은 (잠재적)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가두고 감시하는 상황을 초래할 뿐이다. 이렇게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다 격리시키면 성폭력이 근절 되는가? 그러한 상황을 과연 성폭력 근절이라 말할 수 있을까?
성폭력은 ‘몇몇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우연히 일어나는 사고’가 아니다.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 남성 중심의 성차별적 생활 방식, 폭력에 대한 무딘 감수성 등이 오랜 기간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나는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라면 누구도 성폭력 가해의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피해로부터의 안전 역시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폭력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 발생 이전 단계에서 가해행위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폭력을 만들어내는 구조적 요인들 간의 연결고리를 끊어낼 수 있어야 한다. 분위기를 띄운다는 명분으로 여성에게 술 따르기를 종용하는 술자리 문화, 성별고정관념에 따라 남성의 일/여성의 일을 구분하는 관행들을 바꾸어내는 것 등이 바로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일상에서의 반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고 성 평등한 인식을 키워낼 수 있는 교육의 내실화가 요구되며, 이를 위한 충분한 예산과 인력의 확보가 필요하다. 이는 정부·학교·지역사회 등 사회 전 분야에서 장기간에 걸친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이미 존재하는 법적, 제도적 조치들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전시효과’인 일시적 대처방안을 논의하는 것을 넘어서, 성폭력을 가능케 하는 사회 문화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2008. 4. 14
한국여성민우회 부설 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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