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인권위 '낙태 진정'각하 결정에 대한 논평
인권위 ‘낙태 진정’각하 결정에 대한 논평
2010년 6월, 민우회는 보건복지부를 피진정인으로 국가인권위에 “처벌 위주 낙태 정책의 여성인권침해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지난 11월 23일, 민우회는 '심의한 결과 본 진정은 피진정인의 정책으로 인한 피해자 및 피해의 내용이 특정되지 않고, ‘낙태’의 비범죄화는 형법의 개정에서만 가능하므로 각하하기로 결정’하였고, ‘그러나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일반권고를 통해 각 국에 ‘낙태’를 비범죄화할 것을 권고하고 있고, 귀 단체의 진정취지인 여성의 안전과 생명권 보호라는 측면에서 낙태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2011년 사업에 적극 반영할 예정’이라는 진정 결과 통지문을 인권위로부터 받았다.
올 해 2월부터 가속화된 ‘낙태’처벌 강화로 인해 민우회로는 시술 병원을 찾는 여성들의 전화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 와중에 보건복지부는 전에 없던 [불법임신중절예방종합계획]을 발표하여 낙태신고센터 마련, 생명 중시 문화 확산, 시술한 의사의 삼진아웃제 등 낙태 처벌을 강화하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그동안 민우회에서는 ‘낙태’ 범죄화로 낙태율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아서 키울 수 있는 사회적 토대 마련, 여성이 주체적으로 피임을 제안할 수 있는 관계,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시선 등 다양한 측면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 왔다. 하지만 처벌을 강화하고 ‘낙태’의 문제를 개인의 도덕성 여부로 환원시키는 보건복지부의 정책은 다시금 ‘낙태’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인 문제를 은폐시키고 여성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민우회에서는 ‘낙태’ 문제는 <인권>의 영역에서 재검토하고 재논의 되어야 한다는 판단에서 국가인권위에 보건복지부 정책의 인권 침해 여부에 대한 판단을 요구하였다.
인권위는 6월에 제출한 진정에 대한 판단을 5개월 동안 보류했다. 민우회는 계속해서 진정 결과를 문의하였지만 내부 논의 과정이라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었다. 인권위의 진정 보류는 일선에서 활동하면서 배우자에게 고발당하거나 협박을 받고 있는 여성들의 전화를 받으면서 체감도 높게 전해지는 급박한 상황이 무색하리만큼 지난하고 답답한 시간이었다.
특정한 피해 대상이 없고 입법의 문제로 진정 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각하한 진정 결과도 납득하기 어렵다. 상담 받은 여성들의 실명을 공개할 수 없었던 것은 ‘낙태’ 경험 자체도 드러내기 힘든 사회문화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최근 여성 처벌을 강화하는 현실 속에서 상담한 여성이 처벌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또한 형법에 ‘낙태죄’는 몇 십년간 존재하였다.
이번 진정의 대상은 법안이 아니라 정책이었다. 몇 년 전만해도 보건복지부 주최로 모자보건법의 ‘낙태’ 허용 범위를 넓히는 방안을 논의하였던 데 반해 다시 처벌을 강화하는 보건복지부 정책의 변화가 야기할 수 있는 인권침해 여부에 대한 판단을 요구한 것이다. 진정조건이 맞지 않는다면 바로 결과를 통보했을 것이며 이렇게 오랫동안 ‘민감한 이슈’라는 핑계로 진정을 보류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권위법 제 3조 제2항에는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권한에 속하는 업무를 독립하여 수행한다”고 나와 있다. 인권위는 입법, 사법, 행정 3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독립기구이다. 이것은 인권위의 존재 이유기도 하다. ‘낙태’로 인한 여성 처벌이 현재 합법이라고 해서 정부 정책의 방향이 끼칠 수 있는 인권침해에 대한 진정을 진정 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각하 결정은 법과 정부 정책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해석의 여지를 봉합해버렸다.
하지만 인권위가 ‘여성의 안전과 생명권 보호라는 측면에서 낙태문제를 접근하는 것에 동의하며 2011년의 사업에 적극 반영할 것’이라고 언급하며 ‘낙태공론화’에 힘을 실은 것에 대해서는 우려와 기대를 함께 갖고 있다. ‘낙태’라는 주제는 지금까지 공론화가 되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 했다기 보다 공론화의 ‘방식’이 문제였다. 생명 대 선택이라는 고정적인 구도는 여성의 경험과 다양한 사회적 맥락을 숨긴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낙태'범죄화가 가속화될수록 낙태율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여성 사망률이 높아진 현상을 우리는 계속해서 목격하고 있다. 인권위는‘낙태’범죄화가 여성의 생존의 문제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작금의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낙태’할 수 있는 권리는 ‘낙태’하지 않을 권리와 그 궤를 같이 간다. ‘낙태’문제를 여성문제로만 환원하는 것은 출산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를 묵과하고 책임과 비난의 주체를 여성으로만 위치시키는 것이다. ‘낙태’는 이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직면해야 하는 문제이며 여남간의 평등한 관계부터 사회복지정책까지, 문화와 정책의 영역에서 방대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인권위는 이름에 걸맞게 여성의 다양한 현실을 기반으로 한 인권의 영역에서 ‘낙태’에 대해 접근해야 하며, 현실성 있는 정책과 법 개정을 위한 활동을 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이번 진정의 각하 결정 이후 인권위가 책임지고 지켜가야 할 방향일 것이다.
2010년 11월 23일
한국여성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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