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상반기*함께가는여성] 활동가다이어리_어슬렁, 어슬렁 사무실 산책
활동가다이어리
어슬렁, 어슬렁 사무실 산책
바람(이소희)
여는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 “그래도 우리 그래도 우리 힘껏 서로를 사랑해줄래 이 모진 세상에서” 강아솔의 <그래도 우리> 이 노래를 들으며 썼다. 요즘 자주 듣는 노래, 하루는 듣다가 눈물이 펑펑.
1. 탕비실
나는 사실 탕비실을 좋아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무실 인테리어 공사 이후의 탕비실을 좋아한다.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싱크대가 새 것으로 바뀌었고, 창고처럼 물건들이 쌓여있던 공간에 수납장이 들어왔다. 물때가 끼어있던 그릇거치대를 교환하고, 이가 빠지고 찻물이 배인 컵들을 정리하고, 숟가락과 젓가락도 교체하였다. 냉장고의 곰팡이 핀 음식물과 주인 잃은 도시락 통도 모두 정리하였다. 공간을 정비하니까 그 상태가 계속 유지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틈이 나면 탕비실에 가서 그릇거치대를 닦고, 쓰지 않는 컵을 수납장에 넣고, 전자레인지 거치대, 정수기 걸레질을 하였다. 처음엔 정비된 상태가 유지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시작했는데, 행동을 반복하다보니 마음이 정갈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이 복잡할 때면 점심 도시락 설거지를 천천히 한 이후에, 탕비실을 정돈했다. 3~4월 탕비실은 예뻤다. 탕비실 오른 쪽 창가엔 목련꽃이 하얗게 폈고, 목련이 진 후에 벚꽃이 피고 흩날렸다. 탕비실 정면 창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면 고양이들이 사무실 건물 1층 오색오미 지붕에서 볕을 쬐며 뒹구는 장면을 볼 수도 있었다. 한 번은 영역 다툼으로 고요하고 무게 있게 겨루기를 하다 냥냥펀치를 날리고, 맞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상담소 동무들과 한참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리고 탕비실의 운치가 어느 때보다 돋보이는 날은 비 내리는 날이다. 실제 소리보다 2배는 크게 소리를 확장시키는 탕비실 지붕 덕에 이곳에서 빗소리 하나는 확실하게 들을 수 있다.(소나기나 우박이 내릴 때는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정신 사납기는 하다. 그리고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수도가 매번 언다. 아침마다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수도를 녹이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끙.)
2. 상담소 전화 상담실
(겨울이 되면 외투를 입고 있어도 추운 공간이기는 하지만)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공간은 상담소 전화 상담실이다. 전화 상담실은 작은 책상 하나와 의자, 책장 하나 정도 들어가는 작은 공간이다. 하지만 그 작은 공간에 창이 두 개나 있어서 햇빛과 바람이 잘 드나든다. 한 번은 상담실 창으로 고양이가 든 적도 있었다. 3층 창으로 고양이가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낮 시간에는 상담전화를 받아야하기 때문에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공간이기는 하지만 복잡하고 시끄러운 사무실에서 잠시 혼자 있고 싶다면 점심시간 전화 상담실 방문을 추천한다. 전화 상담실에는 나름 최신의 페미니즘 서적들도 구비되어 있고, 공사 이후 인터넷도 잘 터진다. 점심시간에는 상담전화를 받지 않으니까 울리는 전화 소리는 잠시 무시하고 그 안에서 안정을 취할 수 있다. 비밀이야기도 가능하고, 혼자 울기에도 괜찮다. 누군가 전화 상담실에서 남몰래 울고 나온다면 상담소 활동가들은 그 순간만은 모른척하기로. 많이 지친 모 활동가가 한 번은 상담실에 현수막을 펼치고 잠시 누워 휴식을 취했었다. ㅠ
전화 상담실
꽃이 달려있는 자리
여닫을 수 있게 된 창
3. 사무실 산책
그리고 사무실 끝에서 끝으로 어슬렁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사무실은 긴 직사각형 구조로 되어 있다. 꽤 긴 직사각형. 그래서 왼쪽 끝에 있는 성폭력상담소와 오른쪽 끝에 있는 미디어운동본부의 소식이 감감 멀기도 하다. (예전에 상담소와 미디어는 자리 옆지기로 제법 알콩달콩 했는데 하이, 여경, 소연 오겡끼데스까?) 점심 도시락 설거지 전후로 사무실 오른쪽 끝으로 가 창문을 연다. 창문을 열면 사무실 공기가 순환한다. 인테리어 공사 전에는 사무실에 바람이 드나드는 창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공사 이후 모두가 만족하는 것 중 하나가 고정된 통 창을, 여닫을 수 있는 창으로 바꾼 것이다. 순환하는 공기를 따라 40여 평 정도 되는 공간을 걸으며 이곳저곳을 살피는 재미가 쏠쏠하다. 편의점 얼리어댑터 활동가는 점심으로 무얼 먹나 보기도 하고, 어느 팀 회의 흔적 속 간식을 슬쩍 주워 먹기도 하고, 꽃을 들이는 활동가 자리에 이번 주에는 어떤 꽃이 벽에 붙어 있는지를 살피기도 하고, 밀가루 금지 한 달을 실천하는 활동가가 동기부여를 위해 색칠하는 서른 개의 포도알은 이제 몇 개 남았는지도 보고, 사무실 의자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앉을 수도 있다 모범예시를 보여주는 활동가의 자세를 따라 해보기도 하고, 고양이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활동가의 모습에 ‘진짜 고양이 같다’ 생각하기도 하고, 사무실에서 데시벨이 제일 큰 팀(그 팀은 성평등복지·회원팀이라는 것은 안비밀)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귀를 쫑긋거리기도 한다. 사무실 산책을 하다보면 좁고 긴 직사각형의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느껴져 좋다. 재밌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찡하기도 한 24명의 사람들. 잠시 전환이 필요할 때 사무실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까지 나는 하릴없이 사무실 산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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