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하반기-함께가는여성] 민우ing_이렇게 일하는데 노동자가 아니라고요?
[2021 하반기-함께가는여성] ing
이렇게 일하는데 노동자가 아니라고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민우회 일고민상담실로 전화를 주는 여성노동자들은 일을 하면서 성희롱을 겪고, 괴롭힘에 시달리거나, 약속한 돈을 제 때 받지 못하는 등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그들은 노동부나 사법부에 이런 노동권 침해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구하려 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닌 사람들, 즉 ‘비정형노동자’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담들이 쌓여갈수록 활동가로서 답답함과 무력감을 느꼈다. 반복되는 이 상황을 언제까지 두고 봐야만 하는 걸까.
한국의 주요 노동 법제인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법률 용어로는 ‘근로자’)를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정의(제2조1항)한다. 그러나 현재 법원은 노동자에 대한 정의를 협소하게 보고, 노동자성 판단 시에 전통적인 고용 형태를 기반으로 세분화된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그 때문에 프리랜서∙특수고용직 등 수많은 노동자들은 노동자로 마땅히 누려야 하는 휴무나 노동시간, 임금, 성희롱이나 괴롭힘에 대한 보호 등을 보장받을 수 없다.
민우회는 이렇게 협소한 노동자성 판단기준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구체적인 일의 경험을 듣고, 노동자들이 겪는 성차별을 해소하며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노동권과 사회적 보호조치를 가능하게 할 새로운 법과 제도를 상상하기 위해 〈제도 새로고침: 노동자와 비(非)노동자 사이를 메우다〉 사업을 진행했다. 4월에는 두 차례의 집담회를 열었고, 5~8월에는 전화 및 온라인 설문을 통해 총 46명의 여성 비정형노동자를 만났다.
근로기준법이 인정하지 않아도
명백히 ‘노동’하는 사람들
이미지 설명 :〈일하는 모두를 위한 근로기준법 새로고침〉 토론회 생중계 장면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던 인터뷰이들은 사업(체)의 일부가 되어 ‘노동’을 하고 있지만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들은 기업(사업체)와 전혀 대등하지 않았고, 자율적으로 일의 조건과 보장을 요구할 수도 없이 그저 주어진 일을 수행하며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위치에 있었다. ‘프리랜서’, ‘개인 사업자’, ‘위탁계약자’라고 자신을 부르는 사업주의 무책임한 호명 속에 ‘근로자가 아니다’라고 외면되었던 노동자들은, 그러나 명백히 ‘노동’하고 있었다.
“뭘 찍을 수 있을지에 대한 리스트를 갖다 주면 PD가 결정하고. 그에 따라 섭외하고 세팅해야 하고 그걸 작가들이 한다…현장에서 바로 업무지시가 이뤄진다. 그래서 출퇴근하는 거다.” (방송작가)
“1곳만 (일)하고 있다. 거의 전속처럼 일하고 있으니까. 저희는 계약서가 없고 당연히 겸업 금지 조항도 없지만, 스케줄상 회사가 나오라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방송자막 CG디자이너)
“3개월마다 (계약을) 연장한다. 이유는 그냥 방과후교실 운영 기간이 그렇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전에 교육부 방과후(수업 관련) 연구원이 한 말씀인데, ‘강사의 계약이 불안정해서 강사들이 안주하지 않으니까 방과후수업이 더 잘 운영될 수 있다’고 했다.” (방과후강사)
결국 법과 제도가 나의 ‘노동’을 뭐라고 조각 내어 규정하든, 명백한 것은 ‘내가 타인에게 노무를 제공한 대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은 다 아는데 근로기준법만, 혹은 법을 근거로 판단하는 자들만 우리의 ‘노동’을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닐까.
더욱 취약해지고 부당한 환경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비정형노동자들은 △장시간노동 △더 낮은 임금 △불안정한 노동환경 △성별과 고용형태 등을 이유로 한 차별 △쉼을 비롯한 일상을 돌볼 시간의 부족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 등을 겪고 있었다. 임금은 몇 년째 오르지 않았고, 노동의 대가에는 ‘원고료’, ‘수수료’, ‘강의료’라고 이름이 붙어 있지만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한 부가적 노동은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갑작스런 해고 통보(계약해지)를 받아도 문제제기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비정형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이와 같은 어려움들은 노동현장에서의 위계 상 하위에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로, 전형적인 노동자성을 보여준다. 이들이 진정 ‘자유’롭게 일할 수 있고, 일의 조건에 대한 협상력을 갖고 있다면 이런 대우를 겪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원고료나 책정된 금액 자체가 10년 전, 15년 전보다 오르지 않는 건 물론이고, 덤핑되는 느낌이 있다. 요즘엔 특히 글 쓰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 돈에 해줄 다른 사람 구하겠다’고 한다.” (작가)
“수업을 하는 시간만 노동시간이 아니다. 수업 전에 아이들 관리하고, 끝나고 자리 정리해야 한다…그 외에도 학교가 요구하는 자료들도 만들어야 한다. 하루에 최소한 4시간 정도 수업하고, 자료 만드는 데 하루 1~2시간이 든다.” (방과후강사)
“자의적으로 해약하는 지국장도 봤다. 다른 지국 점검원이 당했다고 했는데, 회사에 대한 안 좋은 기사 내용을 점검원들 톡방에 올렸다가 지국장이 불러서 업무 해약 (서류를) 쓰라고 했다더라.” (대여제품 방문점검원)
“시청률 안 나오면 작가를 갈아치운다. 작가를 갈면서 인적 쇄신을 하는 거다…(방송에서) 핵심은 PD와 데스크인데, 그들도 프로그램을 옮기긴 하겠지만, 밥줄에 영향 미치는 것은 작가 쪽이다.” (방송작가)
성차별 혹은 부당한 대우
흔히 ‘프리랜서’는 능력껏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대다수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은 이와 달랐다. 오히려 더 적나라한 성차별이 만연했다. 여성들이 다수인 직종에서도 경력이 짧은 남성들이 오히려 여성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고 더 빨리 승진했다. 여성들은 여전히 “힘쓰거나 현장 일은 잘 못한다”는 편견 때문에 배제되고, “시집 잘 가면 된다” 류의 말을 듣기도 한다. 결혼을 언제 할 건지 물어보면서 ‘여성들의 결혼=퇴사(일 그만둠)’로 여기고 여성들의 업계 내 성장가능성을 저하시키는 분위기 또한 반복됐다.
배우자가 있든 없든, 가계 생활비의 전부를 버는 사람이든 ‘반찬값’을 버는 사람이든, 일하는 모두는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돈,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일한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들은 여전히 각자 자신의 삶에서 ‘생계부양자’임을 인정받지 못했다. 나름의 전문성을 갖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도 “남편이 벌지 않냐”, “아줌마 시켜도 할 수 있는 일” 등등 차별 발언을 듣고 있었다. 여성의 노동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생계보조적 일로 치부되어 법이 보호하는 노동의 범주 밖으로, 저임금의 영역으로 저평가되었다. 이 또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아니었다. 지겹도록 반복되어온 여성노동의 현실을 또 한 번 마주하게 된 것이다.
“같은 업무 수행하는 동료 남성은 정확히 나의 2배를 받는다. 근무 연차나 학력 등 내가 더 우월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보컬트레이너)
“여자는 여섯 작품 하고 팀장 하는데 남자는 세 작품 하고 팀장이 되는 걸 보면 박탈감을 느낀다. 팀원은 여성이 80-85%로 남자 팀원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인데 미술감독은 남자가 많고.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드라마 미술스태프)
“‘아줌마 시켜도 할 수 있는 건데 니가 와서 하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의 전문성을 갖추기까지) 여기까지의 노력이나 시간, 돈이 많이 무시되는 것 같다.” (미술작가 어시스턴트)
일하는 모두를 위한 근로기준법 ‘새로고침’
인터뷰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정확한 노동조건이 담긴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기를 바랐고, 그렇게 작성된 계약서 내용이 마땅히 지켜지길 바랐다. 또한 △직장내 괴롭힘이나 성희롱 △임금체불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단가) △과도한 노동시간 및 그로 인한 삶의 질 저하, 건강 악화 등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이들은 어딘가에 도움을 구해 노동권을 보장받을 수 있기를 원했다. 더불어 일을 하다 쉴 수밖에 없거나 다쳤을 때 최소한의 생활이 보장될 수 있도록 보호받길 원했다. 이러한 요구가 근로기준법 상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에 들어줄 수 없다고 외면할 수 있는, 무리한 요구일까?
이미지 설명: 민우회는 올해 인터뷰 사업뿐 아니라 [이렇게 일하는데 노동자가 아니라고요?] 시리즈 영상 3편을 제작했다. 영상은 민우회 유튜브 계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출/촬영/편집: 영 *일러스트:수신지
이런 요구사항을 실현할 수 있는 법제도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이들은 모두 보호받아 마땅한 존재들이고, 다수가 제외되는 기존의 ‘노동법’은 더이상 소용없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사업에 이익을 발생시키는 일을 하고’ ‘돈을 받아’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의 행위가 노동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불안정해진 고용 구조에 따라 등장한 ‘비정형’이라는 단어도, 전혀 특수할 것 없는 ‘특수고용’이라는 단어도, 전혀 프리할 것 없는 ‘프리랜서'라는 단어도, 권리를 빼앗기 위한 단어가 아니라 보호를 기본으로 한 고용형태 분류를 위한 단어로 바뀌어야 한다. 이런 변화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들에 대해 다시 질문해보자. 이제는 한시적인 미봉책으로 별도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최소한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일하는 모두를 위한 근로기준법 ‘새로고침’을 시작해보자.
이미지 설명 : 비정형 여성노동자 인터뷰 영상 바로보기
여경(정슬아)
❚ 여는 민우회 여성노동팀
어느새 13년 차가 됐어요. 12월부터 안식년에 들어갑니닷. 잘 쉬고 올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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