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1*12월호 [평동 사무실에서]수호신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_최명숙
[평동 사무실에서]
수호신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
최명숙
요즘 나는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다.
주로 암환자들이 치료를 받는 방사선종양학과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보호자 할머니께서 "무슨 일로 왔느냐? 얼굴을 보니 어디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라며 물어보시는 거였다. 병원에 가면 동병상련을 겪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누군가 살짝쿵만 건들어도 이러쿵저러쿵 주고받는 말이 많아진다. 그러면서 할아버지께서 폐암이라는 걸, 나는 유방암이라는 걸 서로 알게 된다. 할머니가 어디 아픈 것 같지 않다고 하셨듯이 요즘 내 얼굴은 뽀사시(^^) 화색이 돌아 암세포와의 한판 싸움에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그래서 환자가 된 나를 걱정하던 많은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면 오히려 안심을 하게 된다. 늘 끝내지 못한 일들로 쫓기듯이 살아온 일상을 접음으로서 생긴 여유로움이 얼굴로 나타난 게 아닌가싶다.
올해 1월초 유방암이라는 확진을 받았다.
왼쪽 가슴에 몽우리가 잡히면서 병원에 가리라 마음은 먹었으나 바쁘기도 하고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여 차일피일 미루다가 통증을 느끼면서 작년 12월말 병원을 찾았다. 촬영과 초음파, 그리고 조직검사. 종양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그 1주일 동안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가슴과 목으로 꺼이꺼이 몰려들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을 통해서, 암 관련 책자를 통해 유방암과 치료에 대한 정보를 얻으며 꿋꿋하게 견디자고 마음을 다잡긴 했지만 손발이 묶인다는 절망감과 두려움, 막막함은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왠만해선 지치지 않기에 ‘철’종류의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체력과 건강에는 자신 있었던 내게 왜?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조직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의사선생님과 마주앉은 그 순간까지 암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떨쳐버리지 못했으나 예상대로 암이 확실했다. 너무나 뜻밖의 소식에 망연자실한 민우회 상근자들과 그날 밤 늦게까지 눈물 흘리며 서로 기운 잃지 말자고 마음을 굳건히 다잡는 ‘진한 의식’을 치르고 그 다음날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항암주사, 수술, 항암주사, 방사선 치료를 하는 긴 투병과정을 걷고 있다.
지난 1년간 잘 견뎌왔다. 탈모와 근육통, 체력저하 등 몇 가지 증상들은 있었으나 암환자에게 가장 많은 고통을 준다는 구토 없이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항암치료로 인한 고통이 거의 없었기에 적은 양이나마 흐름을 끊지 않고 민우회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 대책도 결말도 나지 않는 질문과 불안감은 한번 물꼬를 트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하며 상심하기보다 나을 수 있다는 낙관적 의지를 가지고 현재 내가 처한 상황에 충실하자, 그리고 파도타기하듯 흐름에 몸을 실어 현재를 즐기자라는 커다란 줄기를 세우니 다른 많은 것들은 사소한 문제가 되었다.
암 자체도 위협적이고 두렵게 다가왔지만 유방을 상실하게 된다는 결핍감 또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여성의 몸에서 유방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감정적으로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유방도 장기와 마찬가지로 몸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결핍으로 여기지 말자, 후천적으로 얻어진 내 몸의 특성으로 여기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12월초면 항암치료가 모두 끝난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또 다른 단계로 접어들어야 한다. 재발위험이 있기에 꾸준한 운동과 먹거리, 마음수련 등 일상의 절제와 관리가 뒤따라야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암세포가 죽냐, 내가 죽냐라는 비상시국이었기에 긴장감 속에서 생활을 조절해왔지만 한 고비를 넘겼기에 긴장의 끈을 놓을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은 상황으로 지난 1년 쉼표를 찍으며 참 많은 것들을 느끼고 생각했다. 아침공기에서, 골목길의 꽃 한그루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에서, 길거리의 간판에서... 이전에 무심하게 흘려보낸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참으로 고맙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것 또한 잊고 싶지 않은 느낌이다.
상근활동가들의 이야기를 싣는 <평동 사무실에서> 원고청탁을 받고 아픈 게 뭐 그리 좋은 일이라고 글까지 쓰며 만방에 알릴까 싶은 마음에서 잠시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동안 격려와 지지를 보내주신 너무나 많은 분들에게, 또 지난 1월의 민우회 총회에서 쾌유를 빌며 희망의 메시지를 써서 유리항아리에 가득 담아주신 회원들에게 이 지면을 통해서라도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마음에서 원고를 쓰게 되었다.
저의 수호신이 되어 주셔셔 고맙습니다. 모두 모두 건강하세요.
최명숙 -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 걸어다니는 민우회라고 불리울 만큼 민우회와 함께한 세월이 인생의 절반인 그녀. 뜻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생활해온 그녀의 저력을 새삼 느낀다. 그런 기운이 전보다 화사해진 얼굴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을까... 언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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