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10월호 [나의 삶, 나의 이야기] 故서혜란 부회장을 기억하며
[나의 삶, 나의 이야기] 故서혜란 부회장을 기억하며
권미혁 ●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
가슴에 더 깊이 새겨지는 사람들
여성민우회의 역사는 활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의 힘과 땀으로 이루어졌다. 어느 한사람 소중하지 않은 이 없겠지만 우리들 가슴에 더 깊이 새겨지는 사람들이 있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민우회 동료들이다.
9월 1일 1주기를 맞았던 최명숙 전 대표가 그렇고 오늘 ‘나의 삶 나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故서혜란 선생님(이후 서혜란)이 그렇다.
여성운동을 생활의 영역으로 확장시켰던
서혜란이 민우회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9년, 민우회 출범 3년 째 되던 해이다.
민우회는 당시 선도적인 정치투쟁체가 주류였던 운동 상황에서 드물게 대중운동을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향과는 달리 실제로 대중의 이해를 조직하는 것은 쉽지 않아 생활 속에서 여성들과 만날 공간과 실천할 거리를 찾는 것이 고민이었다. 돌파구를 찾던 이옥경 당시 부회장이 주목한 사람이 바로 서혜란이었다.
서혜란은 유기농 먹거리 운동 1세대로서 한살림 설립에 참여하고 있었고, 민우회 주부분과는 소비자운동, 환경운동, 농촌살리기운동, 여성운동이 결합된 아이템으로 먹거리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유기농 먹거리 관련 생활협동조합을 건설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광범위하게 이에 대한 이해가 있지만 1989년만 해도 한살림, 카톨릭전국농민회 등 운동세력 중에도 일부만 고민하던 주제였다. 직접 소비자를 대상으로 먹거리를 유통, 판매한다는 것은 더욱이 보통의 노력이나 결심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협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 노하우도 없던 상황이라 민우회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서혜란이 한살림을 나오게 되었고 민우회는 서혜란에게 유기농 먹거리 운동과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을 만드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게 되었다.
우선 서혜란은 현일숙, 고혜정, 이금라, 이성미, 이혜라, 양혜경, 오성숙 등 생협에 관심이 많은 멤버들을 모아 공부부터 시작하였다. ‘민우여성학교’를 통해 회원과 일반여성에게 유기농 먹거리 교육을 하였고 사랑방교실을 통해 생협운동의 필요성을 알렸다.
“민우여성학교에서의 서혜란 선생님 강의는 제게 생협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해준 계기가 되었어요.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자기 가족의 건강을 위해 농약 없는 먹거리를 먹이려는 것쯤으로 이해하던 제가 선생님의 교육을 통해 운동으로서의 생협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알게 된 것이죠.”
(김연순 생협 이사장)
민우회 주부분과의 소비자문제위원회로 출발한 이래 1989년 8월 22일 구성된 20여명의 생활협동조합 발기위원들과 회원들은 출자금을 모으고, 사업계획과 예산안을 만들고 사무실과 창고를 임대하여 이윽고 12월 16일 이효재 선생님을 초대 이사장으로 “함께 가는 생활협동조합”을 탄생시켰다.
민우회 생협운동은 여성운동을 생활의 영역까지 확장시켰다는 면에서 여성운동 내부에서도 민우회만이 갖는 강점이자 특성으로 평가된다. 특히 생협운동계에서는 아무나 쉽게 손을 대지 못하는 농산물 유통 사업체를 여성들의 힘으로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지금은 2만 2천여 명의 조합원을 가진 ‘여성민우회 생협’으로 건재하다.* (*생활협동조합: 여성의 힘으로 만든 대안적 생산과 소비시스템)
그리고 그 과정에서 초창기 생협의 주역들, 특히 서혜란의 역할은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를 꿈꾸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민우회 부회장을 역임한 후 서혜란은 1994년 몸이 굳는 병인 ‘전신경화증’을 선고받게 된다. 그리고 불치병을 가진 채 그녀는 경기도 화성의 야마기시 실현지에 정착하게 된다. 야마기시즘은 무아집, 무소유를 이념으로 삼는 고도의 무소유공동체를 실천하는 사상이다. 그녀 삶의 또 하나의 지향인 대안운동, 공동체운동에 몸을 던진 것이다.
무려 8년 동안 야마기시즘을 실천하던 서혜란은 2003년 경 야마기시를 떠나 다른 공동체를 꿈꾸게 된다. 아직은 완전한 무소유를 실천할 단계에 현실여건이 와있지 않다고 판단하고 1년여의 준비 끝에 2004년 전북 장수에 정착한다. 장수에서 그녀는 작은 마을 만들기와 장류사업(된장, 고추장 등을 만들어 파는 생협 생산자 활동), 생협 관련 강의와 기고를 계속하였다. 이런 그녀의 발자취는 민우회 생협 소식지의 ‘서혜란 칼럼’과 홈페이지의 ‘서혜란의 생활재 이야기’를 통해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실천하는 여성, 서혜란
서혜란을 기억하는 이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그녀가 너무도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헌신성, 낙관, 따뜻함으로 상징된다.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그녀의 헌신성이다.
“억척도 그런 억척이 없었어. 지치지 않고 전국으로 유기농 생산자와 교육현장, 그리고 조합원을 찾아 발로 뛰는, 그야말로 몸으로 보여주는 혜란이의 억척과 헌신성이 없었으면 민우회 생협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이옥경 전 민우회 부회장)
“처음엔 무슨 돈이 있었겠어요. 월급도 안 받고 일하셨어요. 그때는 생활재 하나하나를 우리가 다 나를 때였는데 무거운 쌀자루도 척척 들고… 어쩌면 그때 선생님은 이미 에너지를 다 썼는지 몰라요.”
(이성미 전 남서여성민우회 대표)
여성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 여성의 임파워먼트에 유난히 확신을 가지고 있던 서혜란은 여성의 가능성에 대해 늘 설파했으며 남성중심적인 조직문화를 어려워했다.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적응력과 낙천성 역시 그녀의 장점이었다. 79년 남민전 사건으로 남편과 같이 구속되어 6개월 만에 먼저 출소한 후 고향동네에서 양장점을 차린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럼에도 우러나오는 따뜻함 역시 서혜란이 갖고 있는 큰 덕목으로 기억된다.
새로운 물꼬를 틔운 활동가
지난 7월 13일 너무도 갑자기 서혜란 선생님이 운명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망연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까지도 밝고 힘차게 일하시는 모습에서 많은 이가 병마를 상당히 이기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아쉬움은 더했다.
1989년부터 1990년 초까지 짧다면 짧은 기간 민우회 활동을 했던 서혜란이 이토록 민우회의 역사에 강렬히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혜란은 누가 뭐래도 초창기 여성민우회 활동에 새로운 물꼬를 틔운 활동가이자 민우회 생협운동을 태동시킨 주역이다.
그리고 그녀가 구현했던 ‘생활정치’는 가정을 사적 영역으로 구획함으로써 공적 논의의 장에서 배제하고, 성별분업을 통해 가정의 영역을 여성 개인의 몫으로만 몰아넣던 가부장적 공사구분을 뛰어 넘는 활동이었다. 즉 일상생활을 사회적으로 정치화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는 현재 민우회가 주력하고 있는 활동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비인간적인 질서를 바꾸어 대안적인 삶을 꿈꾸었던 서혜란의 삶은 기존의 가부장 질서를 성평등이 실현되는 새질서로 바꾸려는 여성주의 활동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
서혜란은 또한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은 용감한 운동가였다. 자신이 지향하던 가치와 일상의 삶과의 간격이 이처럼 좁은 운동가를 얼마나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서혜란은 이미 20여년 전에 ‘자기 삶의 변화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여성주의 실천가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여성운동과 그 운동의 의미가 잘 기억되지 않는 현실에서 민우회 운동의 중요한 장을 만들어낸 서혜란의 삶을 소중히 기념함은 우리의 책무라고 할 수 있겠다. 민우회와 민우회 생활협동조합의 오늘이 서혜란의 열정과 헌신에 빚지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민우회의 부회장이자 민우회 생협 전무이사로서의 서혜란 뿐만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올곧이 몸으로 겪고 간 따뜻한 한 여성운동가 故서혜란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권미혁 ●
한국여성민우회 2대 부회장과 여성민우회 생협 전무이사로 여성운동과 생활협동조합 운동에
1952년 12월 경남 거창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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