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봄 [기획] 여성대통령과 여성인재, 그리고 여성노동자
여성대통령과 여성인재, 그리고 여성노동자
김원정 여는 민우회 정책위원
버티고 견디면 주어질 줄 알았던 지난 고통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그럼에도, 드디어,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끝났다. 출범 당시 여성부 폐지 논란을 시작으로 5년 사이 국정 과제로서 성평등 정책의 위상은 추락을 거듭했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여성부’라는 비난 여론은 쉴드 쳐주기도 민망한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지난 5년은 일하는 여성에게 가혹한 시간이었다.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하는 성 격차 지수(Gender Gap Index)에서 한국은 2007년 97위에서 5년 사이 107위로 떨어졌고, 경제참여 기회에서 심화된 불평등이 순위 하락을 주도했다. 취임 당시 40.8%였던 여성 비정규직 비율은 2012년 현재 41.6%로 늘어났으며, 2010년 기준 39.8%인 성별 임금격차는 여전히 OECD 최하위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가 주력했다는 경력단절 여성 재취업 지원 사업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7년 56.3%던 30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임기 내내 하락하다 2012년 56.0%에 그쳤다.
이 와중에 예상치 못한 반전은 50대 여성의 변화이다. 2007년 55.7%였던 50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2012년 59.1%로, 매년 최고치를 갱신하며 가파르게 상승했다. 10년 전에 비하면 5% 이상 증가한 것으로 다른 모든 연령대의 남녀와 비교해도 두드러지는 변화이다. 이와 함께 “요즘 공장, 아줌마 없인 스톱”, “퇴직 남편·미취업 자녀 대신 ‘일하는 50대 여성’ 는다” 등의 기사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주목받은 여성과 보이지 않았던 여성
이들 50대 여성의 일자리는 주로 소규모 제조업, 유통업, 음식숙박업이며, 임금이나 사회보험 등 노동조건이 얼마나 열악한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대선 투표 결과로 나타난 바와 같이, 이들 저소득 저학력 50대 여성들의 지지에 힘입어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고 그렇게 헌정 사상 첫 여성대통령이 탄생했다.
이 상황이 아이러니한 것은 단지 배제된 이들이 보수정당을 지지했기 때문은 아니다. 놀라운 건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는 물론 어떤 후보도 정책 대상으로 주목하지 않았던 50대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를 표로 가시화하고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출했다는 점이다.
지난 대선 공간에서 호명된 ‘여성’은 주로 아이를 낳을 예정이거나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30-40대 여성들이었다. 이들이 당면한 육아 부담을 해소하기 위한 보육공약, 경력단절 방지를 위한 일·가족 양립 대책이 후보들의 주요 여성공약이었고,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도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박근혜의 공약에서는 ‘여성인재’가 유독 강조되었다는 것이 다른 후보들과의 차이점이었다.
장관 및 정부위원회 위원, 공공기관 관리자, 대학 교수와 교장 등에서 여성 비율을 높이고 여성인재 아카데미를 만들어 여성리더를 육성한다는 ‘미래 여성인재 10만 양성 프로젝트’는 대통령의 대표 공약이다. 적극적 고용개선조치를 강화해서 민간기업의 여성 고용률 및 관리자 비율을 높인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력단절 여성에게 맞춤형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여성 새로 일하기 센터를 확대한다는 공약은 이명박 정부 여성인력개발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여성인재와 여성노동자 사이의 간극
사실 정부 정책에서 ‘여성인력’이란 용어가 근로여성, 여성근로자를 대체한 건 꽤 오래 전이다. 2001년 여성부의 출범과 함께 여성인력 활용은 국정 과제가 되었으며 이는 민주정부 10년, 이명박 정부 5년을 거치며 여성정책의 주요 화두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여성인력 활용’이라는 정책 프레임은 늘 어디서든 노동하고 있는 여성을 유휴인력으로 간주하며, 활용되어야 할 자원으로서 여성을 정책 대상으로 상정한다. 일하지 않는 여성은 낭비되는 자원이라는 시각이 저변에 깔리며, 그 내용은 미개발 된 자원을 개발하고 적절한 활용처를 발굴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여성인력에서 ‘여성인재’로 한 발 더 나아간(?)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은 특별히 인적자원이 풍부한 여성에 집중하고 있다. 키워질 여성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여성 자신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 정책 실행 주체인 정부와 대상인 여성을 연결하는 키워드는 양성, 육성, 함양, 개발, 훈련 등이다.
이러한 정책은 일정 정도 정치·경제적 자원을 가진 여성에만 주목하고 저학력·저임금·비정규 여성노동자를 배제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주어진 사회체계 안에 일부 중상위층 여성을 포섭하는” 정책이 될 거라는 비판, 비정규직 여성노동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는 문제제기이다. 때문에 여성인재 양성 공약도 지켜져야 하지만 노동·복지 영역에서 성차별과 여성 배제를 우선 바로잡으라는 주문은 타당하다.
그녀의 길과 우리의 길, 무엇이 여성노동 문제인가
결론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그녀를 강력히 지지했던 하위계층 중장년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돌아보겠다는 약속도 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 이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요구에 관심을 가질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그럼에도 10만 여성인재 양성 공약이 실현된다면 이는 ‘여성’이 이룬 성취이자 ‘여성’ 대통령 박근혜의 눈부신 성과가 될 것이며 한국사회 양성평등의 가장 유력한 지표로 부각될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여성’으로 대표되고 그녀의 당선이 양성평등의 척도로 여겨졌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보면 여성노동자에게 더 나은 정책이 무엇인가라는 쟁점은 예고된 싸움의 출발점으로 적절치 않은 것 같다. 그에 앞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 여성노동문제인지를 정의하는 프레임 경쟁이다. 경력단절 여성이 아니라 경력단절을 조장하는 기업과 사회정책의 공백이, 여성 불안정노동을 양산하는 노동시장 구조가 여성노동 문제로 ‘문제화’ 되어야 한다. 고위·전문직 여성이 차별/평등의 수사를 전유하여 ‘여성’으로 등장할 때, 비정규직 저임금 여성노동자들을 ‘여성’으로 가시화할 수 있는 다른 여성주의 정치와 언어도 요구된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치솟는 등록금은 대학생 문제, 청년 실업은 청년 문제, 고용불안은 남성 가장의 문제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정작 이 모든 불안의 무게를 한 몸에 지고 있는 건 중장년 여성노동자들이다. 누구도 정책의 대상으로 주목하지 않은 이 여성들이 오늘날 젠더화된 사회위기에 항변하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들리게 하는 것. 여성대통령은 가지 않을 우리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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