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봄 [활동가다이어리] 나는, 그 날들의 내가 참 좋았다
나는, 그 날들의 내가 참 좋았다
최진협(나우) 여는 민우회 회원복지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충만함에 잠들 수 있었던 그 밤이 참 낯설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고, 끝내지 못한 일에 조바심이 날 일도 없었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숙면이 나에게 선물처럼 주어졌다.
해야 할 일들이 빈틈없이 채워지던 내 다이어리가 마실, 점심약속, 공연, 나들이, 김치 담그기, 대청소… 따위의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환기를 시키려고 문을 열면 집은 즐거운 소풍이 됐다. 봄꽃이 설레면 그저 향기에 이끌려 느리게 걸었는데 내 사는 주변이 소담스러웠다. 망원시장의 봄나물, 한강의 코스모스길, 하늘공원의 억새밭, 동네 곳곳의 자전거길, 우리동네 작은 산 성미산에서 들리는 아이들 웃음, 햇볕 받으려고 길거리에 내놓은 화분도 참 고왔다. 날이 우중충해지면 서랍에 잠겨 남들에겐 들키고 싶지 않은 내 오랫 적 모습을 조우하며 토닥거리기도 하고, 뒹굴뒹굴 거리다가도 틈틈이 갈고닦아 동물팡 금메달도 땄다. 어느 날은 바닷가에서 일기가 쓰고 싶어져 인적 없는 백사장에 3시간을 달려가 진짜 일기만 쓰고 오는 호사도 누렸다. 꼭 보고 싶었던 홍천의 은행나무숲은 전날 태풍 같던 비바람에 한 잎도 남김없이 싹 다 떨어져 있어 오히려 웃음이 났다. 우리 집에 하루걸러 놀러오던 동네친구는 와서 낮잠을 자곤 했고, 그 옆에서 나는 다시 보고 싶었던 옛 드라마를 틀어놓고 아이들 장난감이 된다던 손뜨개 줄을 만들었다.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혼자 공연을 보러갔다가 나중에는 팔을 휘두르며 환호를 하기도 했고. 사먹는 김치로는 도저히 손수 담근 김치의 담백함과 시원함을 찾을 수가 없어 난생처음 김치를 혼자 담궈 보기도 했다. 해 준 것도 별로 없는데 날 보면 함박웃음을 짓고 제 있는 힘껏 뛰어와 안기는 딸아이도 더 예뻤고, 내 안식을 지지해주던 묵묵한 동거인도 다시 보였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내 주변에서 와글와글 나를 향해 몹시도 재잘거렸다. 나는, 그 날들의 내가 참 좋았다.
나는 백수시절이 꽤 있다. 졸업 후 공부한답시고 놀았고, 한 직장에 오래 버티질 못해 다른 직장을 구하기까지 다닌 만큼의 곱절을 예사로 놀았다. 아무 의욕 없이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던 때 친구는 내게 ‘뼈 없이 드러누워’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때나 안식휴가 때나 온전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은 같았지만, 그때의 나는 시간을 흘려보냈을 뿐 아끼지 못했다. 내 마음이 달라질 수 있었던 건 너는 쉬어도 된다던 지지 그리고 쉼에 대한 재정후원, 그리고 그날들이 한정 없이 이어지지 않으리란 확신이 그 시간들을 아껴 보낼 수 있는 조건이 되어주었다. 기다리던 만화책을 볼 때처럼 몇 장 남아있지 않았을 때의 안타까움도 똑같았고 다 끝나고 난 뒤엔 너무 후루룩 읽어 버린 건 아닌가싶어 다시 되짚어 읽고 싶은 아쉬움도 들었다. 그렇게 아껴 보낸 만큼 그 시간들이 내게 진한 향기가 되어주어 그 시간들이 참 고맙다.
지난 시간 내가 느리게 보냈던 시간 속에 민우회는 여전히 빠르게 많은 것들을 헤쳐가고 있었다. 그간의 이런저런 운동의제들을 살피니 그 안에 ‘생애주기에 쉼을 제도화하기, 노동안식년제’를 담고 있다. 쉬는 동안에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이 나를 부러워했던 걸 떠올려 보면, 노동안식년제는 모든 이들의 바람인 것 같다. 일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달이라도 나처럼 쉬고 싶다고 전하기도 하고, 전업주부는 월급을 받고 쉬는 것도 돌아갈 곳이 정해져 있는 것도 부럽다 했다. 모두의 바람이 닿아있는 것이라면 마냥 꿈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삶의 조건이 될 수 있도록 조직되고 만드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나의 지난 안식휴가는 꿈이 아니라, 조직적인 흐름과의 호흡 속에 마련된 지속가능한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상의 평안과 소소함이 참 기쁘고 행복했던 그 시간들이 다시 나의 서랍 속에 들어간 지 3개월, 나는 다시 민우회에 와 있다. 민우회에서 활동하고부터 줄곧 나의 활동영역이 되어주었던 여성노동과는 뜨겁게 안녕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활동을 만들어가는 회원팀이 되었다. 3개월이 되었건만, 하는 것마다 새로운 일인 것처럼 긴장이 된다. 그래도 금세 회원들과 소소하게 만들어가는 깨알 같은 감동이 하루에도 몇 번씩 생기는 일이 많아 함께하는 것에 의미를 마음으로 쌓아가고 있다. 안식휴가를 가기 전 ‘함께 느끼고, 함께 만드는’ 것에 대한 진심과 감동이 지금의 내 운동 속에 숨 쉬고 있는지 자신이 없을 때의 기억이 새삼스럽다. 내게 쉼은 바람을 넘어 운동을 이어갈 의무이기도 했고, 비우기 위한 계기이고 다시 시작할 용기이기도 했다. 그런 시간을 내게 선물해준 준, 민우회 벗들에게 고맙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