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가을 [민우ing] 모두의 삶을 바꿀 보육제도를 위해
[민우ing] 모두의 삶을 바꿀 보육제도를 위해
권박미숙(먼지) 여는 민우회 성평등복지 회원팀
‘보육’은 8.5%의 이야기?
한국인 중 ‘보육’과 상관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1살~7살인 아이 328만명을 키우고 있는 집은 분명 보육과 상관이 있다. 가구당 아이가 두 명이라 쳐도 164만 가구가 보육 중인데, 이 집의 부모 양쪽이 보육 당사자이니 명수로는 328만명. 여기에 세집 중 한집은 조부모도 양육에 참여하는 것을 고려하면 430만명. 엄청난 숫자지만 비율로는 8.5%이다.
이 숫자의 아이러니는 보육문제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430만 명이 때론 행복하지만 매일은 고단하게 아이를 키우며 산다. 하지만 이 고단함에 대한 사회적 대안이 적극 모색되고 있진 않다. 올해 초 무상보육이 전면 시행되면서 대단한 보육제도를 갖춘 나라라도 된 듯 떠들썩하긴 했다. 하지만 보육비 지원이 있어도 믿을만한 어린이집이 없어 고심하는 양육자들을 보면, 어딘가 일그러진 정책이 생색만 요란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보육기의 부모들은 아이를 돌보다보면 (또 직장까지 다니다보면) ‘잠 한번 푹 잘’ 여유조차 없다. 그러니 당연히 대안을 만들어갈 여력도 없다. 결국 ‘몇 년 만 버티자’는 심정으로 오늘도 이를 악무는 것이 최선의 선택지가 된다. 나머지 91.5%는? 당연히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여기는 게 인지상정. 아이가 있는 부모들도 보육기가 지나면 ‘애 키울 땐 다 그렇다’는 후일담을 간직한 채 눈앞에 닥친 또 다른 삶의 문제들에 집중하는 게 인지상정인 것이다.
비혼여성에게도 남성에게도 보육정책은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과 다른 정책철학으로 시행된 외국의 보육정책들을 보면, 그리고 그 정책의 결과 나타난 다른 삶의 모습들을 보면, 보육이 단지 8.5%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복지 선진국 스웨덴은 OECD 국가 중에서도 출산율이 높기로 유명하다. 놀라운 사실은 이 출산율의 50%가 미(비)혼모 출산이라는 점이다. 혼자 일 하면서 아이를 키우기에 무리가 없는 보육제도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또 스웨덴은 기혼여성 경제활동참여율이 90%에 육박하고, 보육기관에서는 아이와 함께하는 아빠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스웨덴 보육정책이 단지 비용을 지원하거나 시설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복지체계의 기반을 ‘남성이 생계를 부양하고 여성이 돌봄을 책임지는 가족’ 모델에서 ‘스스로 생계를 부양하며 동시에 돌봄을 수행할 수 있는 인간’ 모델로 바꾼 결과 삶의 형태가 달라진 것이다.
부양자와 양육자로 나뉜 남녀의 쌍이 아니어도 아이 키우기에 무리가 없는 사회, 남성도 양육자인 사회, 양육과 상관없이 여성이 자기 생계를 부양할 수 있는 사회. 이런 사회라면 결혼만을 정상적인 삶이자 생존 가능한 경제적 대안으로 강권하는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또 그 결혼을 한 뒤, 집안일과 아이로 속 썩는 사람은 결국 여자이고, 부양자의 고역과 권위를 함께 얻는 사람은 결국 남자라는 현실 앞에 좌절하는 이들도 줄지 않을까. 그러니 보육은 보육기 부모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안적인 보육정책은 ‘가족’이라는 틀에 얽혀있는 우리 삶의 구조를 바꾸는 정책인 것이다. 스웨덴 보육정책의 목적이 ‘성평등’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2013 성평등복지 프로젝트 <보육, 현실이가 제도씨에게 묻다>
삶의 틀을 바꾸는 복지제도. 민우회가 추구하는 ‘성평등복지’도 바로 이런 것이다. 올해 민우회 성평등복지팀이 진행하는 <보육, 현실이가 제도씨에게 묻다> 역시 마찬가지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어떻게 바꾸면 될까? 답은 역시 삶 속에 있다. 그래서 성평등복지팀은 5~8월에 <가장 사소한, 가장 절실한>이라는 이름으로 ‘릴레이 수다회’를 열어 다양한 처지에 놓인 양육자들의 이야기를 모아봤다. 이야기를 살짝 옮겨보자면….
국공립어린이집 입소 노하우? 임신테스트기 두 줄 확인하자마자 신청하기. / 취업맘이 일을 그만두는 세 번의 고비 ① 출산휴가 직후 ② 초등학교 입학 직후 ③ 중학교 입학 후 아이 성적이 떨어진다며 학교에서 호출할 때. /애 있는 사람은 거주의 자유가 없다. 결국 받아주는 어린이집이나 친정 혹은 시댁 근처로 이사할 수밖에 없으니까. / 월급에 맞먹는 베이비시터를 쓰는 이유? 어린이집 등하원 시간에 맞추려면 회사에서 듣게 되는 '애 있다고 또' 라는 그 말이 지겨워서. / 직장에서 일할 때 동료가 필요하듯 육아도 같이 고민하고 갈등할 동료가 필요하다. / 간신히 버티다가도 애가 아프면 다시 멘붕. 내가 무슨 영화를 보려고 애가 아픈데 회사에 나와 이러고 있나, 난 이기적인 엄마인걸까. / 종일 애랑 붙어있으면 지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결국 아이에게 못 웃어줄 상태가 되고,버럭 화를 내고나면 자괴감에 빠진다. 난 엄마로 자격미달인 걸까? / 아이가 있어도 일을 계속하는 이유?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경력단절은 곧 경력 추락이기 때문에. 아이가 생겨서 일을 그만 둔 이유?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서, 3살까지는 엄마가 키워야 ADHD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에 불안해서. 그럴 수밖에 없는 각자의 정당한 이유들과, 그리고 남는 공동의 질문 '그런데 왜 남자들은 아이 때문에 일을 계속할지 그만둘지 고민하지 않는 거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보조양육자 없는 맞벌이 아빠’ 수다회에 모이신 분들이 해주셨다. 몸은 직장에 있어도 마음은 어린이집에 가있는 상태라 멘붕이라는 얘기가 취업맘들의 속사정과 꼭 같았던 이 그룹의 아빠들은 ‘이렇게 둘 다 애매한 채 매일 시간에 쫓겨 사느니 일을 그만두는 건 어떨까.’ 고민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수다회는 ‘재우기’와‘밥 먹이기’라는 최고난이도의 양육까지 맡고 있는 남성들의 모임이었다. 보통 아이들은 엄마 없이 잠들지 않는데 그래서 ‘역시 모성이란 게 있나보다’라는 결론이 쉽게 나곤 한다. 하지만 이들의 말은 달랐다. “애를 끼고 잘 수 있는 건 아이가 어릴 때 1년 육아휴직을 하고 애착관계를 만든 덕분이에요. 남성 육아휴직을 확대하는 정책이 꼭 있어야 돼요. 아이가 애착을 형성하는 어린 시절에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이 있어야 아빠도 아이와 친밀함을 가질 수 있거든요.”
대안에 대한 요청도 있었다.
"모든 직장이 4시에 끝나면…, 그럼 해볼 만하지 않을까요? 애 때문에 직장 그만둘 일도 없을 거고. 엄마들이 학습지 교사나 보험 판매원 같은 시간제 일자리에 몰리는 것도 사실 그래서잖아요."
"손주돌보미제도요? 양육을 공공연하게 가족의 일로 만들자는 건데, 절대 반대예요! 가족 안에서만 이걸 감당하려니까 이렇게 허리가 휘는 건데."
"양육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자기만의 시간이에요. 이게 보장되도록 보육제도가 만들어져야 돼요. 혼자 24시간 양육을 전담하는 상태로 있으면 정말 삶의 질이 너무 낮아지거든요. 그럼 양육의 질도 낮아질 수밖에요."
"어린이집은 문제도 많지만, 문제제기를 해도 해결이 안되는 게 더 큰 문제더라고요. 문제제기를 해봤자 결국 애 맡길 다른 곳이 없으면 부모가 '을'일 수밖에 없거든요. 근데 이게 학교라고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학교에서 급식이나 체벌 문제가 생겼으면 아마 학교가 발칵 뒤집혔을 거예요. 어린이집도 관리나 규제, 보육교사 처우 같은 게 학교 수준이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를 위한 변화를 시작하자
수다회 결과는 연구작업을 거쳐 대안적 보육정책을 요청하는 토론회(11월 중)로 갈무리 될 것이다. 수다회에서 나온 지혜를 모아 모성 신화를 벗어던진 현실적인 육아서도 만들 예정이다(10월 중). 계획대로라면 6월까지였던 수다회가 8월로 이어진 건, 애 키우는 사람들이 정말로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가장 바쁜 ‘보조양육자 없는 취업맘’ 그룹은 날짜를 정하는 데만 한 달 이상이 걸렸다. 그래서 수다회를 마무리하며 ‘아이 키우며 가장 힘든 점’을 물었을 때, ‘쉴 시간 없음’이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엄마는 아파서도 안 된다고 할 정도로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지만 대답은 달랐다. 그래서 마음이 짠했다.
“몸이 힘든 건 그래도 버티면 지나갈 거라고 생각해요. 근데 상처가 되는 말이 딱 하나 있었어요. 그래도 세살까진 엄마가 애를 끼고 키워야 된다는 말. 법륜스님도 그러셨잖아요. 삼년은 엄마가 출근을 하더라도 애를 떠안고 출근을 해야 한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죄 짓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결국 애한테 문제가 생길까봐, 그게 제일 힘들어요."
이 운동이 보육을 가족의 책임, 그 중에서도 엄마의 책임으로 짐 지우는 사회를 바꾸는 시작이 되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변화의 결과는 결국 우리 모두가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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