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가을 [민우ing] '경력단절'이 아닌 일과 삶이 재구성되는 과정으로서 '공백'을 발견하다
‘일’로서 재구성 되는 ‘삶’에 주목하다.
이공계를 전공한 사촌언니. IMF의 여파로 전공을 살린 취업이 어려웠다. 그러다 계약직이긴 했지만 은행에 취업하게 되어 집안의 ‘안심’이 되었다. 몇 년 뒤 정규직(실상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었을 때 친척들 모두 언니가 계약직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했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며 워킹맘으로서 일·가정 두 마리 토끼를 야무지게 잘 챙기며 살고 있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얼마 전 통화를 하다가 알게 된 언니의 속내는 달랐다. 언니는 안정적으로 보이는 지금의 일을 그만두고 싶어 했다. 정규직과의 현격한 급여차이, 바늘구멍보다 좁은 승진통로, 새로운 업무로 전환하기엔 애매한 나이 등 상대적 박탈감때문에 일에 의욕을 가지지 못했다. 출산육아휴직 같은 제도는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긴 하지만 이후의 전망을 그릴 수 없다며 그냥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토로까지 했다. 그러나 언니는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왜냐하면 나름 괜찮은 복리후생과 일․가정양립이 가능한 지금의 직장은 아까운 일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만두고 재취업을 한다면? 근로조건이 더 열악한 일자리밖에 없다는 걸 언니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경력단절’ 여성은 재취업이 더 어려울까? 여성에게 ‘경력’이 ‘단절’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왜 남성에겐 ‘경력단절’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을까? 여성노동의 흐름을 상징하는 M자 곡선의 가운데 하강 점은 정말 출산육아 때문일까? 이러한 의문과 동시에 ‘아직’ 회사를 다니고 있는 언니의 이야기는 ‘경력단절’과 재취업을 경험한 여성노동자의 이야기와 상당히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력단절’ : 왜 지금 이야기되고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올해 박근혜 정부는 고용률 70%를 올리기 위해 그만큼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노동정책 로드맵을 발표했다. 대표적으로 내놓은 정책은 바로 ‘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시간제 일자리 창출. 이에 부합하듯 각종 여성인력센터 및 관련 기관들은 ‘유망’ 직종에 대한 취업훈련 프로그램과 강좌를 마련했고 여성부 장관이 직접 교육현장을 둘러보며 ‘경력단절’ 여성의 재취업 여론을 만들었다. 이러한 정부정책의 배경은 일과 아이돌봄이 병행되는 시간제 일자리를 통해 여성노동자의 ‘경력단절’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경력단절’ 여성에게 맞춰진 시간제 일자리 정책은 먼저, 여성에게만 양육의 책임을 전제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둘째, 시간제 일자리의 양적 창출만큼 중요한 노동조건의 질에 대해서 어느 정도 담보하고 있는지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성 취업률을 높이기 위한 정책이 논의되는 것 자체는 어쨌든 반가운 일이긴 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실제 삶 속에서 쓸모 있는 정책, 여성들의 필요를 제대로 반영한 정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경력단절’ 여성의 일에 대한 욕구와 재취업 현실이 실제 어떤지 알아보고자 노동팀에서 10명의 여성 노동자를 만나서 일 경험의 흐름 속에서 ‘경력단절’ 된 이유, 재취업 과정과 노동 경험을 인터뷰하였다.
‘경력단절’ 여성의 재취업 키워드: 나이, 자격증, 비정규직
3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세대의 ‘경력단절’ 경험을 가진 여성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재취업을 하는 과정에서 10명 각각의 경험들이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하게 겹치는 교집합의 노동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먼저, 재취업에 나서는 여성들 대부분 나이장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나이든 ‘경력단절’ 여성노동자에게 재취업의 문은 상당히 좁고 적은 것이 현재 노동시장의 모습이다. 나이 들지 않은 동시에 경력 있는 노동자를 선호하고 있는 기업현실 속에서 경력을 쌓기 위해 일단 일 경험을 가져야 하는데 정작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는 아이러니가 발생되고 있다.
나이의 단점을 커버하고 취업을 더 잘하기 위해서 ‘경력단절’ 여성들에게 자격증 취득은 기본이 되어가고 있다.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요구하고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재취업이 가능한 것처럼 몰아가는 신자유주의적인 흐름에 ‘경력단절’ 여성들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청년들에게만 스펙이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국가공인 스펙을 쌓고 최소한의 경력을 만들기 위해 ‘경력단절’ 여성들은 각종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돈과 시간을 들이고 있다. 그러나 자격증을 따더라도 ‘성공적인’ 재취업이 아닌 계약직 일자리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안정적인 일자리는커녕 민간 자격증 시장만 점점 확대될 뿐이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이문제를 뛰어넘어 일자리를 구하더라도 계약직이거나 프리랜서 형태의 일자리뿐이다. 실제로 충분한 일자리가 창출되고 있지 않으며 있더라도 불안정한 일자리뿐이라는 게 ‘경력단절’ 여성 노동자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혹여 재취업에 성공하더라도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전업주부로 돌아가게 되면서 또 다시 경력이 단절되기도 한단다.
다양한 방식으로, 안정적으로 채워져야 할 ‘공백’
10명의 ‘경력단절’ 여성들의 이야기 속에 무기 계약직으로 일하는 언니의 사직을 만류하는 이유들이 녹아져있다. 우리가 만난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아직’ 경력단절 되지 않은 언니의 현재 상황과 다르지 않다. ‘일다운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일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유리벽장 속에서 취할 수 있는 차선책이 전업주부이거나 열악한 일자리밖에 없는 등 교집합의 지점은 넓게 겹쳐있었다. ‘경력단절’ 경험을 가진 여성들이 일을 그만둔 이유로 출산양육의 문제는 표면적인 것일 뿐, 실제로 ‘공무원’처럼 안정적이고 성차별 없이 근로조건이 ‘괜찮은’ 일자리였다면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현 정부정책은 ‘출산양육’을 ‘경력단절’의 전부로 보고 있기 때문에 ‘경력단절’이 일어나는 여성노동자의 세세한 노동문제에 대해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여성 고용률을 높이는 방법은 ‘경력단절’의 이유를 ‘출산양육’이라는 단일한 분석이 아닌 성차별적 사회구조와 열악한 노동조건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여 일자리의 양뿐만 아니라 노동의 질을 전반적으로 높이는 데 있다.
그리고 노동과 노동 사이가 비어져있는 것을 단절로 보는 게 아니라 다음의 지속가능한 노동을 위한 ‘공백’으로서 관점을 전환한다면 여성 노동자의 다양한 욕구와 현실을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노동자에게 필요한 건 ‘경력단절’ 여성만을 위한 한시적인 정책이 아니라 모든 여성노동자에게 ‘좋은’ 일자리, 안정적인 노동조건을 보장하는 것이다.
* 경력단절 경험을 가진 10명의 여성노동자의 인터뷰를 정리한 <‘공백’의 발견>은 민우회 블로그(womenlink1987.tistory.com)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여성주의저널 일다(www.ildaro.com)에서도 공동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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